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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Sep 24. 2019

달리는 문제투성이, 자영 <아워 바디>

아워 바디 (2018)



8년째 행정고시 준비 중. 식사는 라면, 일탈은 맥주. 빛도 들지 않는 자취방처럼 어두컴컴하기만 한 자영(최희서)의 일상은 색도 맛도 없다. 안경 너머 생기 없는 눈에 담는 것이라곤 문제집과 애정 없는 남자친구 뿐. 그마저도 잘 살라는 무성의한 이별 통보를 내놓고는 퇴장해버린다.


아무런 열정도 남지 않은 자영은 설상가상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찰 정도로 몸마저 무너져있다. 그러니 자영에게 현주(안지혜)가 어떻게 보였겠나. 몸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경쾌하게 달리는 현주는 자영에게 없는 것을 모두 갖췄다. 일과를 마친 늦은 밤 뛸 정도의 열정과 지치지 않고 바닥을 차고 나가는 활력이 만들어내는 광채에 자영은 단숨에 매료된다.


그래서 자영은 달리기 시작한다.

힘겹게 다리를 끄는 수준에 불과했던 자영이 달리기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웃을 일이 생긴다. 러닝앱에 달린 거리와 시간이 찍힌 기록을 보고 활짝 웃는데, 그 숫자들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지루하고 불안한 수험 생활을 견뎌온 자영이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성취였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몸을 움직여 만들어낸 작지만 확실한 성과는 자영에게 새로운 에너지가 된다. 부스터를 단 엔진처럼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러너로서 그러한 가속을 경험했다. 달리는 것은 횡단보도 신호가 깜빡일 때 말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곡 하나가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던 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하루 종일 무가치하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지고 있던 우울증 환자가 아주 조금은, 그러니까 3분 45초를 뛸 수 있는 만큼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3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뛰었을 뿐이었지만 마치 42.195km를 뛰고 난 마라토너처럼 벅찼던 성공의 기쁨은 나를 러너로 만들었다.ᅠ

자영 역시 매일 밤 현주가 속한 달리기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뛰면서 제법 러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헐렁한 옷 대신 몸에 밀착되는 운동복을 입고, 근력 운동도 시작한다. 사람들은 달라진 자영을 빠르게 감지한다. 시험을 포기한 딸을 비난하던 엄마는 이제야 좀 사람 같아 보인다고 칭찬하고, 동료들 또한 밝아진 자영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자영 역시 비로소 육체를 감각하기 시작한다. 마치 몸이 거기 있는지 몰랐던 사람처럼 자신의 몸에 무관심했던 그는 근육이 만져지는 배와 팔을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본다.ᅠ


그러나 달리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시험에 붙여주지도, 정규직을 얻어주지도 못한다.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 전에 없던 활력을 얻지만 그의 문제가 달리기로 인해 일거에 사라지지 않는다.

힘들게 뛰고 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효능감은 생각보다 쉽게 휘발된다. 화려한 색의 운동복을 입고, 직접 만든 술을 음미하며 삶이 주는 다채로운 색과 맛을 즐기는 것 같던 현주가 실은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달리기에 집착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영 역시 친구에게 동정을 일당으로 받았을 때, 그렇고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무작정 나가서 뛴다. 물론 뛰고 와도 문제는 거기 그대로 있고, 나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래도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뛸 수는 있다. 뭐가 달라지냐고? 글쎄, 달리는 문제투성이인 사람이 되는 거지. 자영처럼 그리고 나처럼.

현주가 앞 사람의 기를 빼먹는다고 생각하고 달리면 훨씬 덜 힘들다고 했는데 오늘은 자영이 앞에 있다 생각하고 뛸 생각이다. 달리기로 인해 자신의 몸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자영이 뿜어내는 생기가 내게도 넘어오길 바라며.



이지혜 / 영화기자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영화 속의 멋진 여성 캐릭터와 그보다 더 멋진 주위의 여성들에게서 힘을 얻습니다.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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