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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Sep 30. 2019

김기영-정일성, 파격의 세계

파계, 육체의 약속, 이어도, 반금련



어떤 만남은 파격으로 다가온다. 그런 만남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꼭 기억해야 할 만남이기도 하다. 1970년대 김기영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의 첫 만남이 정확히 그러하다. 김기영은 누구인가. 1955년 데뷔작 <죽엄의 상자>를 시작으로 50년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경유해 모더니즘의 세계로 뛰어든 감독, 인간의 욕망 내부와 세부를 과감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예술가다. 


특히나 그의 영화 속 여성들은 당시의 도덕과 풍속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밀실에서, 욕망과 무의식의 세계로 뛰어들거나 그로 인해 뒤틀려 있다. 정치, 사회, 문화의 암흑기인 1970년대를 통과하는 김기영의 돌파구는 여기에 있었다. 


영화 밖 현실의 문제로 눈을 돌리거나 영화가 시대상을 떠안아야만 한다는 과몰입과 필요 이상의 강박을 집어던지고 그는 더 깊이 자기 관심사로 천착해 들어갔고, 흔히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영화 형식 미학으로 자신만의 출구를 만든 것이다. 그로써 김기영 영화는 그로테스크, 기이, 기괴, 광기, 폭발적 에너지라는 수식의 말을 얻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김기영이라는 세계를 구축하는 데는 정일성이라는 탁월한 파트너가 있었다. 정일성은 누구인가. 한국영화 촬영감독 1세대로 1957년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김기영을 비롯해 유현목, 김수용, 이두용, 배창호 등 한국영화사의 주요 감독들의 중요 작업을 함께한 촬영감독이다. 



물론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에는 <만다라>(1981), <개벽>(1991),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을 함께한 임권택도 있다. 그런 정일성이 김기영과 조우한 건 1971년 <화녀>다. 


<화녀>의 주요 공간인 집안은 전체 구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부분으로만 등장한다. 칸막이, 투명 혹은 불투명한 창, 가림 천 등으로 공간은 분절돼 있고 우리는 그 구획 너머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 위험한 사정의 전모는 완벽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압도적인 색채. 지금 와서 봐도 과감한 색채 활용은 이 영화의 시각적 몰입과 흡입력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계단, 쥐, 독약, 섹스, 유혹의 눈빛과 육체의 접촉, 살인과 죽음 등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응축한 대상들과 몸짓이 등장했다가 은폐되고 출몰했다 파괴된다. 


김기영과 정일성 두 사람의 만남이 부른 파격의 시도는 이후 <충녀>(1972), <파계>(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반금련>(1981), <화녀 82>(1982)로까지 이어진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이 바로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많은 경우 감독의 세계에 가려져 뒤늦게 조명받거나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덜 언급되거나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스태프의 세계를 전면으로 끌어올린 아마도 첫 번째 사례이고 대표적인 경우가 정일성 촬영감독일 것이다. 


1957년 <가거라 슬픔이여>로 촬영감독에 데뷔해 임권택의 <천년학>(2006)에 이르기까지 그가 작업한 영화의 목록은 셀 수 없이 많고 그 수많은 작품에는 한국영화사를 쓸 때 반드시 언급돼야 할 게 수두룩하다. 그 목록과 시간을 돌아보던 정일성은 “가장 호흡이 잘 맞는 감독”으로 김기영을 꼽은 바 있다. 


한국영화 속 70년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파격의 영화 형식의 한 예를 보고 싶다면, 촬영이 한 명의 감독의 세계에 미친 영향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김기영-정일성의 작업을 훑어보면 좋겠다. 격식을 깨부수는 두 사람의 에너지, 그 결과로서의 영화의 에너지가 꿈틀거릴 테니까.



파계, 지금 볼까요?


육체의 약속, 지금 볼까요?


이어도, 지금 볼까요?


반금련, 지금 볼까요?


정지혜 / 영화평론가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제11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문위원, 영화 웹진 <REVERSE>의 필진이기도 합니다. 『너와 극장에서』(공저, 2018), 『아가씨 아카입』(공저 및 책임 기획, 2017), 『독립영화 나의 스타』(공저, 2016) 등에 참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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