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2015)
주변에 한두 명쯤,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왜인지 좀 더 여유 있고 긍정적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저 역시도 유머를 시도하는 편인데요. 어색한 공기를 만드는 아재 개그로 끝날 때도 있지만, 어쩌다 한 번은 그 상황을 웃어넘기는 행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유머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유머의 비밀을 알려줄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화성에 살아요. 경기도 화성이 아닌, 지구에서 7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행성 말이죠. 탐사 도중 예상 밖의 모래폭풍을 만났고,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팀원들이 먼저 떠나버린 탓입니다. 영화 <마션>의 '마크 와트니'입니다.
이 사내 멘탈이 대단합니다. 농사도 짓고 셀카도 찍으며 곧잘 살기 때문이죠. 어떤 상황이든 우습게 표현하는 그를 보고 있자면, 보이는 거라곤 모래뿐인 평균기온 영하 80도의 행성에 고립된 게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유머 실력을 가졌길래 그리도 즐겁게 사는 걸까요. 그래서 뽑아봤습니다. 배꼽 앗아가는 마크의 유머 Top 5.
1. "운 좋게도, 저는 식물학자예요."
마크는 누가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카메라를 통해 일상을 공유합니다. 자신이 죽더라도 그 기록은 지구인의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겠죠. 어느 날 그는 카메라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화성에서 감자를 재배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운 좋게도' 식물학자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어제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 구경할 일 없는 고독한 공간에 남겨졌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죠. 그럼에도 '운이 좋다'고 말하며 그 척박한 땅에 농사를 계획합니다. 심지어 한 마디 덧붙이죠. "화성이 두려워할 겁니다. 저의 식물학 파워를."
2. "날 버리고 가지 말았어야지."
감자를 재배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이 필요해집니다. 하지만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가 마땅치 않았죠. 그는 동료 '마르티네즈'의 개인 물품인 십자가를 깎아 불쏘시개로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물건의 주인인 그에게 사과하며 말합니다. "이걸 원치 않았으면 이 황량한 행성에 날 버리고 가지 말았어야지."
3.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마크는 본래 탐사 목적지였던 스키아파렐리 분화구로 이동하기 위해 로버(우주 자동차)로 예상 주행을 해봅니다. 거리가 굉장히 멀기 때문에 연료 절약을 위해 온도 제어장치도 끄고 이동하죠.
하지만 화성의 추위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위험성이 매우 높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자신의 뒷자리에 놓기로 결정합니다. 추위 문제는 해결했지만 방사선에 노출된 상태나 다름없죠.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뒷자리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걱정할 수 있겠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루이스 중령의 개인 파일을 다 뒤져 봤는데 이 노래가 그나마 낫습니다."
그가 음악을 들으며 참담한 표정을 보입니다. 직면한 상황 중 가장 큰 문제가 중령의 음악 취향이라니.
4. "Are you f---ing kidding me?"
동료들의 우주선인 '헤르메스호'와 만나려면 마크가 탑승할 상승선이 더 빨라야 합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상승선의 안정장치들을 제거해야 하는데요. 그 소식을 들은 마크는 지구로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냅니다.
"Are you f---ing kidding me?" (순화하면 "장난쳐 지금?"정도가 되겠네요.)
화성 임무 총책임자인 '빈센트 카푸어'가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팀원에게 '마크의 대답이 유머인지 혹은 진심인지' 물어봅니다. 문자만으로는 그의 표현을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죠. 자신이 직접 미묘하게 표정과 억양을 바꾸며 그의 응답을 유추해보는데요. 그 모습이 참 재밌습니다. 당연히 마크는 유머였겠죠?
5. "우린 네가 싫었을 뿐이야."
결국 마크는 동료들과 다시 통신할 수 있게 됩니다. 말이 필요 없는 유머의 정점이죠. 그 짧은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지난 시간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화성에 버리고 온 거 미안해. 우린 네가 싫었을 뿐이야. 거긴 좀 어때?"
"사고로 주거 모듈을 날려버렸어. 근데 불행하게도 루이스 중령님의 디스코 음악은 살아남았지."
유머의 비밀
화성과 지구의 상황이 교차되며 진행되기 때문에 마치 그가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마크는 사각 모양의 작은 카메라를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말하는 것을 멈추면 황량한 바람소리 외엔 어떤 것도 없었죠.
그가 자신 외에 살아있는 존재와 실제로 소통한 건 약 3개월 만에 지구로 신호를 보내는 것에 성공하여 그 응답으로 패스파인더의 카메라가 조금 움직인 게 최초입니다. 그럼에도 왜 유머를 아끼지 않았을까요.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유머(Humor)'는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입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다양한 장면의 고통을 덜 공격적이고 더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글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저 역시 이따금 동료에게 유머를 시도하곤 하는데요. 바쁜 일상이 반복되어 피로가 쌓일 때 "와, 우리 아직 살아있네요?"라고 하는 식입니다. 이 구질한 유머에도 "아마 내일쯤은 죽지 않을까요?"와 같이 답변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뭐 대단한 합이라도 완성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죠. 반면에 정색하며 한숨만 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웃음이 나오나 보네요?"라며 의도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죠. 만약 마크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대했다면 어떤 결과가 이어졌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일상이 개선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무언가 개선되려면 항상 예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쨌든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마크가 감자의 재배를 생각해내고, 패스파인더를 찾아내고, 상승선으로 이동할 방법을 깨닫는 과정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가 각 상황을 스스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결코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길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현재에 집중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보며, 마음이 동했습니다. 유머란 그런 것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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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선이 이륙하기 전, 동료들과 무선을 주고받던 마크는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1년 7개월여의 시간을 화성인으로 살며 인류 최초의 적응을 이뤄낸 남자. 하지만 인류 중 누구보다 지구인이 되고 싶었던 것도 그가 아니었을까요.
마션, 지금 보러 갈까요?
왕고래 / 작가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어요.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