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윙
최고의 정치 드라마로 꼽히는 ‘웨스트 윙(West Wing)’에는 두 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시즌 전반부와 중반부를 책임지는 조시아 바틀렛(마틴 쉰)과 후반부를 이끄는 매튜 산토스(지미 스미츠)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7년 동안 총 7개의 시즌이 나올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틀렛과 산토스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장면이다.
시즌 2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백악관 참모들이 처음 바틀렛의 선거캠프에 합류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워싱턴에서 가장 실력이 출중한 보좌관이었던 조쉬 라이먼(브레들리 휘트포드)은 아무런 기대 없이 찾아갔던 무명 정치인 바틀렛의 연설을 듣고 그의 참모가 되기로 결심한다.
시즌 6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의 종지부를 찍는 전당대회를 다루고 있다. 줄곧 3위에 머물러 있던 산토스는 마지막 연설을 통해 민주당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선 후보로 당선된다.
둘 다 극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의 속성 자체가 극적이라는 면에서 사실적이기도 하다.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사물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이 현실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신과 혐오, 그리고 배신과 계략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웨스트 윙에서 묘사한 바틀렛과 산토스의 연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민감한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하기보다는 비전과 꿈을 제시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두 인물의 연설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바틀렛: “제가 반대했던 낙농법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를 입었다는 지적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제 지역구의 많은 농가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좋은 것을 이루기 위한 피해였습니다.
현재 미국 내 최대 빈곤층은 어린이들입니다. 다섯 어린이 중 하나가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희망없이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섯 명 중에 한 명의 어린이가 말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가 우리의 사명이라면,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겐 우리보다 더 좋은 것을 주자”는 인류애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저는 사람들이 우유를 좀 더 손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을 막아 화가 나고 원망스럽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에게 저의 선택과는 다른 것을 기대하신다면 다른 후보를 찍으셔도 좋습니다.”
산토스: “(유력한 당선 후보자인) 베이커 주지사께서 부인의 사소한 질병 문제를 공개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오늘 내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공개해야만 했다는 여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베이커 주지사께서 공개를 안 하신 이유는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워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위선적인 것은 우리이지, 베이커 주지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아닌 척 할 뿐이죠.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환상에 집착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완벽해야 하고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이번 주에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저는 공직과 특혜로 선거인단을 회유하란 권고를 받았습니다. 또한 민주당의 통합이 여러분의 선거권보다 중요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정권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완벽한 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표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돌아올 특혜를 위해 투표하지 마십시오. 국민의 이상과 희망, 그리고 꿈을 위해 투표해주십시오. 강하고 자유로운 미국을 건설해낼 덕목을 구현하고 있는 후보에게 투표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께선 시애틀, 보스턴, 마이애미, 오마하, 털사, 시카고, 아틀랜타 등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셔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민주당원입니다!””
정치를 머리로만 하려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자신의 참모를 비롯해 동료 정치인,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그리고 그 가슴은 대개 도덕적 감정선을 건드려야 움직인다. 높은 비전, 도덕적 정당성, 옳은 편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끔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예컨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얘기했지, "나는 계획이 있습니다(I have a plan)"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중은 그 사람의 꿈에 움직이지, 절대로 계획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이고, 그것은 더 깊은 질문, 즉 무엇(what)이 아닌 왜(why)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편리함보다는 감동을 주는 사람, 감동을 주는 제품, 그 사람을 지지함으로써 혹은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러했고, 애플 제품들이 그러했다.
결국 대중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사람을 찾고 있다. 따라서 정치인이라면 내가 믿는 바, 내가 꿈꾸는 바를 얘기해야 한다. 물론 그 뒤에선 정교한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이 순서를 바꿔 접근해 자멸하거나, 아니면 하루하루는 매우 바쁘게 그러나 대중을 향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치인생을 끝낸다.
웨스트윙, 지금 보러 갈까요?
손정욱 /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前 국회의원 보좌관
정치와 인연이 깊은 비정치인입니다. 지난 10년은 여의도에서, 지금은 제주도에 거주하며 한국과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를 들여다보고 있는 섬사람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