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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치노트 Mar 27. 2022

리차드밀이 티타늄을 다루는 방식

내친김에 티타늄 등급 정리도(feat. 랑에 운트 죄네 허니 골드)

시계가 시간을 나타내는 기계를 넘어 오브제가 된 지 오래지만 리차드밀은 뭐랄까, 그 수준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남다르다. 독보적인 상상력과 기술력, 디자인을 모두 갖춘 예술품이라고 해야 할까. 테니스 선수 나달의 손목에 시계를 채운 마케팅 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색채가 뚜렷하기로 유명한 리차드밀 애용하는 소재로는 단연 카본과 함께 티타늄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리차드밀 특유의 토노형(술통 모양) 케이스로 자주 등장하지만,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맥라렌 로드카의 디자인 특을 모두 살린 기념비적인 케이스 등 그들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실현하는 데에도 쓰였다.


케이스에 2800시간, 무브먼트에 8만6000시간
RM 40-01 오토매틱 와인딩 투르비용 맥라렌 스피드테일. 사진=리차드밀 제공

RM 40-01 맥라렌 스피드테일은 맥라렌 로드카 중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스피드테일의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살려 만든 시계다. 맥라렌의 디자인 디렉터 랍 멜빌이 "우린 예술에 가까운 품질을 가진 자동차를 만들었다"며 "스피드테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이 시계는 마감과 소재, 타협 없는 디자인으로 이를 증명했다"고 극찬할 정도로 역작으로 꼽힌다.


실제로 4시 방향의 셀렉터를 누르면 자동차 기어처럼 중립, 와인딩, 핸드세팅 모드를 설정할 수 있다. 이름뿐만 아니라 디자인에서도 슈퍼카의 특징을 담으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케이스 또한 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등 슈퍼카의 모습을 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주목할 점은 이 케이스가 가공하기 어려운 티타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소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티타늄은 높은 경도 때문에 성형 단계부터 브러싱, 폴리싱까지 시계에서 사용하기엔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금속이다.


리차드밀에 따르면 기술 디렉터 줄리언 뵐라(Julien Boillat)를 중심으로 꾸려진 리차드밀의 케이스 담당팀은 이 케이스를 만드는 데에 꼬박 2800시간을 들였다. 순수 작업시간이 아닌 일수로 따지면 18개월로 전례 없는 긴 개발 기간이었다고. 그 결과 날렵하만서도 독특한 케이스 곳곳 곡선 형태의 모서리 마감, 미러 폴리싱, 사틴 브러시 처리 등으로 군더더기 없지만 풍성하게 채우는 데에 성공했다.


케이스 밴드엔 리차드밀의 상징 격인 카본TPT 소재를 사용했다. 탄소섬유 필라멘트 층들을 45도씩 바꾸면서 쌓아올려 만든 소재다. 카본 섬유답게 내구성이 높고 가볍지만 제품마다 다른 나무같은 결이 살아있 것이 특징이다. 필라멘트를 쌓을 때 금박을 으면 나무같은 결 사이에 금이 층층이 들어가는 '골드 카본 TPT'가 탄생한다.


결과적으로 RM 40-01 맥라렌 스피드테일은 섬세하게 마감한 티타늄과 카본TPT를 더해 펑키하면서도 깊이 있다. 정말이지 과장되지만 품격있는 역설적인 시계다. 폴리싱한 티타늄의 화려한 빛 반사와 카본의 빛이 스며드는 듯한 질감의 대조, 분명히 미래적인 소재를 사용했지만 결이 나무를 닮아 어딘가 따뜻하면서도 자연적인 카본TPT의 특징 때문이다.

칼리버 CRMT4의 브릿지. 사진=리차드밀 제공

재밌는 점은 배젤과 케이스백뿐만 아니라 무브먼트의 브릿지와 베이스 플레이트, 나사, 로터 축 등에 모두 5등급 티타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브릿지엔 PVD 코팅을, 베이스 플레이트엔 일렉트로플라즈마 처리를 했다고 한다. PVD는 최근에 관련 글을 써서 알겠는데 사실 일렉트로 플라즈마는 정확히 어떤 과정인지 찾아봐도 모르겠다. 일단은 티타늄의 색상을 바꿨다는 정도로만 이해해야겠다. 단 중요한 건 주요 티타늄과 카본 사이의 중간 톤으로 처리해 두 주요 소재가 시각적으로 뜨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잡아줬다는 것.


리차드밀은 칼리버 CRMT4라고도 불리는 이 무브먼트 개발하는 데에만 8만 6000시간이 들었다고 소개한다. 소재뿐만 아니라 투르비용, 이례적으로 크기를 키운 날짜창, 이용자의 생활 습관이나 상황맞춰 로터 회전 수를 조절할 수 있는 가변 지오메트리 로터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능이 담겼다.


리차드밀이 티타늄으로 얻은 가장 큰 장점은 무게와 내구성다. 아쉽게도 RM 40-01 맥라렌 스피드테일의 무게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일반적으로 리차드밀의 시계가 20~30g 수준이라고 알려진 것을 생각하면 리차드밀이 긴 시간을 들여서까지 가볍기로 소문난 티타늄을 사용하려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오차와 고장 가능성을 낮추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티타늄은 높은 경도와 내식성으로 부품의 마모나 부식을 방지하면서 오작동을 줄일 수 있다. 리차드밀 역시 RM 40-01 맥라렌 스피드테일에 5등급 티타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생체 적합성과 내식성, 독보적인 견고함을 지닌 합금을 사용해 기어 트레인이 쉽게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티타늄에도 등급이 있다
랑에 운트 죄네의 허니 골드. 사진=랑에 운트 죄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다. 5등급 티타늄이 있다면, 등급이 다른 티타늄도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티타늄이라고 다 같은 티타늄은 아니다. 골드만 봐도 구리 등 첨가한 소재의 종류와 비율 등에 따라 색과 특성이 달라지지 않나. 얼마 전엔 랑에 운트 죄네 시계를 구경하다가 허니 골드라는 소재도 봤다. 한정판 시계에 자주 쓰이는 모양인데, 며칠 전에야 알았다.


허니 골드는 랑에 운트 죄네가 연구소와 개발한 금 합금으로, 201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선 '꿀벌이 만드는 달콤한 액체를 연상시키는 합금'이라는데, 사진만 봐도 기존 금보다 밝고 투명한 느낌이 든다. 손상에 강하지만 성형이 어렵고, 특허까지 받은 제조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티타늄 역시 들어간 성분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 리차드밀이 사용한 5등급 티타늄 역시 기존 티타늄에 다른 성분을 더해 '티타늄 합금'으로 따로 분류된다. 어떤 티타늄이든 기본적으로 가볍고 경도와 내식성이 높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성분을 더해 필요한 성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리차드밀 역시 자신들이 사용한 5등급 티타늄에 대해 "티타늄 90%와 알루미늄 6%, 바나듐 4%로 만든 합금"이라며 "이렇게 배합하면 기계에 사용했을 때 티타늄만의 장점이 높아져 우주, 항공, 자동차 산업 등에 자주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금속기업 'TSM 티타늄'에 따르면 티타늄은 기본적으로 1~4등급으로 나뉜다. 등급이 낮아질수록 순도가 높아진다. 반대로 가면 산소, 질소 등 첨가한 성분이 많아진다. 일반적으로 이 과정에서 강도가 올라간다. 따라서 1등급 티타늄은 비교적 가장 부드러운 편에 속하고, 성형이 쉽다. 배관 등에 자주 사용되는 이유다.


2등급 역시 성형은 쉬운 편이지만 경도가 1등급보다 높다. 2등급 티타늄은 가격 경쟁력이 높은 게 가장 큰 특징인데, 산업계 전반에서 가장 널리 쓰여 다른 등급의 티타늄보다 가격이 낮은 편이다. 1등급 티타늄처럼 배관 등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기체의 겉면 등 섬세한 성형과 어느 정도 높은 강도가 요구되는 데에도 쓰인다. 이후 3등급 티타늄과 4등급 티타늄으로 높아질수록 성형이 조금씩 어려워지고 경도가 높아진다.


5등급 티타늄부터는 티타늄 합금(Titanium Alloy)이라고 부른다. 티타늄에 주석이나 니켈, 구리, 철, 망간, 팔라듐, 바나듐, 크롬 등 다른 금속을 더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1~4등급 티타늄처럼 내식성과 내구성도 높다. 리차드밀의 설명대로 5등급 티타늄은 알루미늄과 바나듐, 철을 더한다.


5등급 티타늄과 함께 자주 쓰이는 티타늄 합금으론 팔라듐을 넣어 용접성과 성형성이 높은 7등급 티타늄, 12등급 티타늄, 23등급 티타늄 등이 있다. 티타늄 등급은 38등급까지 올라간다.



+ 주다스 프리스트의 'Living after midnight'을 들으면서 썼습니다. 의외로 데이비드 게타의 'Titanium'는 안들었습니다.


+ 소재의 다양성은 곧 표현의 확장이니 소재에 관심을 갖는 건 뜻깊다고 엔딩을 내고 싶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 엔딩은 따로 안하겠습니다. 제 마음만 알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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