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끝내자마자 잡일이 쏟아져 씻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땀에 절은 운동복 차림으로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바쉐론 콘스탄틴의 하이 워치메이킹 팝업스토어에 갔다. 사전 예약제라 방문객들은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한다. 계획대로라면 적어도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갔을텐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바쉐론 콘스탄틴 실물을 한번 더 보는 게 어딘가 싶다. 좀 민망한 게 문제였지, 미닛 리피터 울트라씬이 얼마나 얇은지도 궁금했는데이 기회에 볼 수 있어좋았다. 다만 울트라씬 얘기를 하기 전에, 오늘 유독 반가웠던 시계가 따로 있었다.
전부터 이 시계의 슬라이더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사진은 화질만 봐도 알겠지만 모두 직접 촬영
전직장에서 '기업인의 시계'라는 시계 코너를 기획해 맡은 적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는 전혀 참고하지 않고, 기업 총수들이 어떤 시계를 차는지 내가직접 알아보고 그들의 삶과 해당 시계의 스토리를 엮는 기사였다.
당시 한회장께서 사진 속 트래디셔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차는 걸로 추정됐는데, 사실 이마저도 알아내느라 몇일을 헤맸다. 힘든 만큼 애정도 많은 기사였는데, 오늘 팝업 스토어에서 이 시계를 실물로 처음 봤다. 시계도 사람처럼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만나면 친근하고 반갑나보다.
이 시계는 지난해 취재 당시 국내 재고가 없어 예수금 50퍼센트를 내고 스위스에서 공수해와야 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전시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냐고 여쭤보니 가능은 하지만 전시 이후에 살 수 있다고 하신다.
그 다음으로인상깊게 본건 미닛리피터였다. 아래 사진에 나온두 모델 모두 미닛리피터인데 아래쪽이 울트라씬 모델이다.
울트라씬 치고 다소 두껍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소리를 내서 시간을 알려주는 미닛리피터는 기본적으로 무브먼트에 공(징:Gong)을탑재해야 한다. 해당 미닛리피터에 공 두개가 들어간 걸 생각하면 저 두께가 상당히 얇은 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해를 위해 전시된 미닛리피터 무브먼트 모형도 찍어왔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무브먼트 측면에 끊긴 파이프같은 게 두개 감겨있는데 이게 공이다. 길이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울림쇠라고 보면 된다. 왼쪽 사진 11시 부근에 날개처럼 좌우 대칭으로 달린 은색 부품이 해머인데, 이 해머로 공을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그 밑에 있는 스프링은 해머를 움직이는 부품이 아닐까 싶었다. 이처럼 미닛리피터엔 공뿐만 아니라 해머와 '해머 스프링'까지 한 무브먼트에 넣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울트라씬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물론 바쉐론이니까 했겠지.
집에 와서 해외 사이트를 뒤져보니 이 스프링이 상당히 주목할만한 부품이었다. 모형으로 전시된 해당 1731 칼리버는 기존 레버 타입 무브먼트들과 달리 작동시 소음이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레버 타입 무브먼트들은 일종의 지렛대인 레버로 해머를 작동하는 반면, 1731 무브먼트는 이 배럴 형태의 스프링으로 해머를 움직여 작동 소리가 작은 데다 빠르게 해머를 움직일 수 있다고. 평상시엔 스프링의 힘이 해머에 전달되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사용했다는데 사실 이건 무브먼트가작동하는 걸 직접 봐야 이해가 갈 것 같다. 어쨌든이 정도로 공들여 개발한 기술이라면 확대 모형까지 만들어 전시할만 했구나 싶다.
또 재밌게 본 시계는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헤리티지 라인으로 유명한 히스토릭의 콘 드 바슈 1955. 설명을 들어보니 콘 드 바슈(Cornes de Vache)는 소뿔을 뜻한다. 러그가 소뿔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해당 모델은 1955년에 만들어진 바쉐론 콘스탄틴의 첫 방수 크로노그래프를 모티브삼아 만들어졌다. 사진에선 러그가 잘 보이지 않는데, 바쉐론 콘스탄틴 정식 사이트에서 보면 왜 소뿔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왼쪽 사진에선 노란 조명때문에 케이스가 골드로 만들어진 것처럼 나왔는데 실제론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했다. 왼쪽에 있는 시계는 오버시즈.
개인적으로 바쉐론 콘스탄틴은 러그를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고 생각한다. 대표 모델인 패트리모니만 해도 시계에관심 없는 사람들 눈엔 뭐가 특별할까 싶겠지만, 러그의 모양새가 다른 드레스워치와 비교했을 때 독특한 편이어서 한번 의식하고 나면 계속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겐 유난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바쉐론답게 정갈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이 뚜렷하다.
이 외에도 레트로그레이드 등 다양한 모델이 소개됐는데, 행색이 민망해서 급하게 나오느라 사진을 못찍어왔다. 대신 스마트폰을 뒤져보니 아밀러리 투르비용 모형을 찍어왔다. 천문학자들이 쓰던 혼천의(아밀러리) 모양으로 만든 투르비용이다. 두개 축으로 회전해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줄이고, 캐리지에 바쉐론 콘스탄틴의 상징인 말테 크로스 엠블럼을 새겼다. 회전 속도는 15초마다 정렬되는 정도. 바쉐론 콘스탄틴의 말테 크로스에 얽힌 정말 재밌는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분량이 좀 필요해서 나중에 풀어야겠다.
오늘은 좀 평범하게 팝업스토어 리뷰로 끝내나 했는데, 어쩌다보니 또 지협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시계의 내부를 보여주는 행사는 언제나 뜻깊다. 시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부분까지 많은 이들의 오랜 노력과 고민이 담겨있어서, 누군가 한명쯤은 이런 이야기들을 열심히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귀중한 일을 브랜드가 직접 나서서 많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준다니, 두 팔 들고 반기지 않을 수가 있겠나.
끝으로 오늘 팝업스토어 직원 분들께서 친절하게 반겨주시면서 설명은 안필요하신지 여러 번 물어봐주셨다. 사실 오늘 제 행색 때문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덕분에 재밌는 시간 보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오늘 글은 클래식을 들으면서 썼습니다. 고전음악 말고 디제이 프리미어와 라킴, 나스, KRS원, 그리고 짧게 칸예가 참여한 'Clas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