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lf Teeth Gear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믿어왔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알고보니 저란 놈은 잔뜩 멋을 부려놓고도 "후후 멋이라뇨? 오레사마는 순수하게 '기-능'을 따랐을 뿐입니다만?"이라며 거짓부렁을 알삼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의 슬로건을 허세에 가득차서 인용해대고 다닌 겁니다.
저는 스마트워치도 귀찮아서 안 차는 시대에 옛 카우보이들이 회중시계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청바지의 '코인 포켓' 이야기에 열광하거나, 죽을 때까지 목수를 볼 일 없는 나라에 살면서 망치 걸이가 붙은 카펜터 팬츠를 입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아한 건 기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인간적인 이 이야기들의 모순적인 매력을 인정하고 나니, 바우하우스의 슬로건엔 '이게 보기에도 멋있는데, 그냥 멋있기만 한 것도 아니야. 이런게 진짜 멋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제 청소년기같은 마음이 은근히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늑대 이빨 모양 톱니(Wolf’s Teeth Gearing)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정보를 필립스(Phillips)에 올라온 한 기사에서 얻었으니, 출처를 밝히고 발췌하듯 쓰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에 정말 재밌는 글이 올라왔거든요. 로건 베이커(Logan Baker)가 쓴 'In-Depth: The Enduring Appeal Of Wolf’s Teeth Gearing In Fine Watchmaking' 입니다.
베이커는 톱니 끝이 늑대 이빨처럼 한쪽으로 둥글게 휜 기어가 최근 자주 보이는 데에 주목했습니다. 늑대 이빨이라곤 했지만, 제 눈엔 초침이 물흐르듯 움직일 있도록 분주히 흘러가는 둥근 파도같았지만요.
베이커는 독립 시계 제작자 사이먼 브렛(Simon Brette)의 데뷔작인 크로노메트르 아티잔(Chronomètre Artisans), 지난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파텍필립(Patek Philippe), 필립 뒤포(Philippe Dufour)의 시계 등에서 이런 형태의 톱니를 여러번 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시계 전문 미디어 타임존(TimeZone)의 전무였던 윌리엄 매세나(William Massena)는 "과거 회중시계 수집가들이 늑대 이빨 모양 기어를 사용한 시계를 보여준 적이 있다"며 "하지만 단순한 마감의 또 다른 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베이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늑대 이빨 톱니는 1771년 전설적인 워치메이커 장 투안 레피네(Jean-Antoine Lépine)가 처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시계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입니다.
브레게에게 영향을 준 워치메이커로도 알려져있고, 볼테르의 시계를 만들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돌죠. 이 때문에 브레게가 레피네의 영향을 받아 늑대 이빨 톱니를 사용했다는 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피네는 당시 '사보네'라고도 알려진 헌터 스타일 케이스를 적용하지 않고 얇으면서도 심미적인 시계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때문에 헌터 케이스가 아닌 회중 시계를 오픈 페이스 워치, 또는 레피네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칼리버, 즉 무브먼트 역시 레피네 이전엔 지금과 달리 플레이트 두 개를 사용했는데, 플레이트를 한 개만 쓰고 브릿지를 적용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 역시 레피네입니다. 무브먼트 수리 난이도를 대폭 낮추고 심미성을 높인 이런 디자인은 지금에서야 무브먼트의 전형처럼 그려지지만 엄연히 '레피네 칼리버'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어쨌든 다시 베이커의 글로 돌아오면, 늑대 이빨 톱니는 레피네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당시엔 이런 톱니가 기존 톱니들보다 내구성이 높을 것으로 여겨졌을 거라는 추측이 나옵니다.
베이커에 따르면 전설적인 독립 시계 제작자 역시 부틸라이넨(Kari Voutilainen) 역시 "늑대 이빨 톱니는 과거에 더 강한 톱니를 만들 때 쓰였다"며 "각 톱니의 뿌리가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과거엔 톱니 뿌리가 종종 사각형에 가까웠는데, 이에 비해 늑대 이빨 톱니는 뿌리가 더 커지면서 더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는 겁니다.
레피네는 이후 20년간 이 디자인을 고수합니다. 하지만 1790년대 이후로 늑대 이빨 톱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게 베이커의 설명입니다.
어쩌면 레피네가 이렇다할 장점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현대 일부 시계 전문가들은 이런 늑대 이빨 톱니가 실제로 별다른 기능적인 장점이 없다고 봅니다. 'La Montre Francaise'를 쓴 아돌프 샤피로(Adolphe Chapiro) 등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워치메이커가 만든 디자인이기 때문인지,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 때문인지 늑대 이빨 톱니는 파텍 필립과 오데마피게(Audemars Piguet), 예거 르쿨트르(Jeger-LeCoultre)를 포함한 수많은 시계 제작자들이 도입했습니다.
비록 레피네는 이 기술을 버렸지만, 19세기에 스위스의 장 아드리앙 필리프(Patek Philipp의 예), 루이 오데마르스(Audemars Piguet), 샤를 앙투안 르쿨트르(Jeger-LeCoultre), 영국의 샤를 프로드샴(Charles Frodsham), 벤자민 벌리아미(Benjamin Vulliamy), 에드워드 존 덴트(Edward John Dent)를 포함한 많은 제작자들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이후 손목시계의 시대가 열리고 쿼츠가 시계 시장을 점령하면서 늑대 이빨 톱니는 모습을 감추는 듯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기계식 시계 수집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이런 디테일을 찾는 이들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사이먼 브렛은 늑대 이빨 톱니를 적용한 이유에 대해 "제 브랜드에 진심으로 바라는게 있다면 최고의 기술과 제가 가장 사랑했던 19세기 워치메이킹의 요소들을 적용하는 것"이라며 "19세기 최고 시계 제작자 중 한명인 레피네를 떠올리게 하는 늑대 이빨 톱니을 적용할 수 있어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늑대 이빨 톱니는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워 이 기어가 고급 시계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재밌는 점은 현대 시계 제작에 자주 쓰이는 CNC 머신으론 늑대 이빨 톱니를 만들기가 어려워 지금도 하이엔드 시계에서나 볼 수 있는 마감 기술이 됐다는 거죠.
HSNY(Horological Society of New York)의 이사이자 시계제작자인 니콜라스 마누소스(Nicholas Manousos)는 '콧수염 레버(Moustache Lever)'의 사례를 들며 늑대 이빨 톱니가 과거 다양한 시계 기술 실험의 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19~20세기엔 해당 부품이 팔렛 포크의 균형을 더 잘 잡아줘 정확한 시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