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고 가볍게 괴로움 칠하기

법륜스님 1~2강을 듣고

by 물지우개

불교 수행의 핵심은 깨달음이다. 이치와 원리를 깨달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괴로운 사람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법륜스님께 여쭈었고 스님은 늘 그렇듯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다. 이 해법에 금세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걸 몰라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다소 어이없는 반응도 많았다.


나는 스님이 말씀해 주시는 그 ‘이치’에 동의하지만 그 이치가 쉽사리 내 것이 되지 않는 점에 다시 괴로웠다. 이 또한 스님이 말한 ‘욕심’이라는 데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각해보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삶의 본질이 괴로움이기 때문이 아닐까? 욕망과 권태의 끝없는 반복은 ‘아! 이건 욕망(욕심)이구나!’ 혹은 ‘아, 권태롭구나!’라고 알아차려도 결국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삶의 궤도는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과 결과가 다 괴로움이라면 이치와 원리를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님은 지속적인 연습과 ‘알아차림’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내 괴로움은 ‘알아차림’만으로는 그리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방법은 ‘지속적인 연습’뿐이다. 스님이 말씀하신 추천 연습기간은 최소한 석 달, 적어도 삼 년이다. 그러나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한결같이 연습할 수 있을까? 평생을 욕망과 권태만 반복한 궤도를 ‘영점 일 도’만큼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즉 깨달음은 내 삶의 나쁜 궤적을 알고 내 수준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타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욕심과 권태를 차근차근 밟아온 내 발에 있다는 ‘깨달음’, 높을 거라 생각한 내 위치가 사실은 양수가 아니라 음수로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알아차림’인 셈이다. 모든 괴로움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면 자기혐오에 가까워질 위험도 있지만 변화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기에 그나마 희망을 논할 수 있다.


내 말을 오해해서 화내는 가족에게 나 또한 화를 낸 이유는 내가 가족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었다는 피해의식과 내 수고를 알아달라는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심리상태에 따라 가족의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그 ‘변화무쌍함’을 이해한다. 비록 아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편하게 연락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망각과 거듭된 나 자신의 ‘알아차림’으로 이 문제가 괴로움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로 희석되리라 믿는다. 스님은 강조하셨다. “사랑한다면 덕 보려 하지 마라!”


나는 거절이 싫어서 외로워도 누군가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잘 못한다. 거절은 미움이고, 상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무례한 거절이 아닌 정중한 거절은 애정의 표현이므로 나는 상처 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 나는 얼마나 많은 거절을 해왔었는지, 심지어 그 거절이 모두 예의 있었을까 반성한다.


비록 내 삶의 바탕색이 괴로움뿐이라 하더라도 힘주어 더 진하고 거칠게 칠 할 필요는 없다. 무거운 질문에 스님의 심플한 해법처럼 힘 빼고 가볍게, 설렁설렁 채워가고 싶다. 이것이 불교의 깨달음이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세상에 그나마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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