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시경과 와인 귀신 5

비비노 쓰는 법

by 춥다물

판촉사원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비비노를 검지로 길게 누른다. 그리고 인영이 받들고 있는 와인병의 사진을 찍어서 비비노가 스캔할 수 있게 조금 기다려준다.

“자 여기 보시면”

인영은 얼른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어깨너머로 고개를 꺾는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셔야 하는 게, 이 아래쪽의 맛 부분이에요. 이 와인은 대부분 오키(oaky), 블랙 프루티(black fruity), 얼씨(earthy) 한 순서로 많이 느끼시는데 고객님은 거기에 치즈나 기름 맛 같은 이스티(yeasty) 맛도 느끼신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아까 고객님이 말씀하셨던, 무거움, 드라이함, 부드러움 같은 노트이죠.”

인영의 마스크 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러면 다음에 새로운 와인 찾으실 때 이 네 가지 노트가 있는 와인을 찾으시면 실패를 줄이실 수가 있어요. 그리고 취향에 맞지 않는 와인도 한번 찾아서 저장해 두세요."

“아 그래야 저랑 안 맞는 노트 조합을 알 수 있겠네요!”

“네 맞아요. 아유 잘 아셔, 참.”

"선생님 정말 프로셔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어느새 인영은 두 손을 내 앞으로 공손히 포개서 판촉사원에게 와인을 팔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손을 씻고 인영은 첫 번째 와인을 오픈했다. 바깥의 찬 공기, 마트 내의 뜨거운 히터, 다시 바깥 찬 공기에 호되게 혼난 코가 뻥 뚫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문자용 와인이라고 와인 대가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던 그 와인을 한 모금 호로록 마셨을 때 인영은 분명히 차가운 와인에서 따뜻하지만 달지 않은 바닐라 라테가 빨간색 술이 되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경험을 했다.

“와. 씨”

한 잔만 마시려고 닫았던 와인 마개를 다시 열었다. 두 잔, 세 잔. 그렇게 한 병을 다 마신 후 안락의자에서 잠이 들어 새벽 1시에 눈을 떴다. 입술이 벌겋게 물들어 있는 것을 눈을 반쯤 감고 양치를 하면서 봤다. 비몽사몽간에 다시 잠이 들어 다음 날 인영이 눈은 뜬 것은 11시였다. 오랜만에 길고 나른한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았다. 몸이 가벼운 동시에 나른했다. 그리고 곧 인영은 두 달 반 만에 시커먼 혈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검붉은 색. 이게 바로 대장 내 출혈이구나 잠깐 털썩 주저 않았다가 자신이 어제 어떤 초겨울쯤, 이마트에 출몰하는 와인 귀신에 홀려 일주일치 식비를 와인 두병에 다 쓰고 그 와인 중 한 병을 다 마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를 하면서 실소를 터뜨리고 오랜만에 항씨에게 말을 건다. '항씨 미안, 내가 진짜 미친년이다.'


샤워를 끝낸 인영은 집을 나서기 전 붙박이 장의 오른쪽 슬라이딩 문을 밀어 아래 선반에 차곡차곡 접어 높은 에코백 세 개를 빼 앞으로 맨 동전가방에 가지런히 넣는다. 그 아래 선반의 손수건 코너의 맨 앞 손수건을 꺼내 뒷 주머니에 넣는다. 중지를 살짝 튕겨 슬라이딩 문이 부드럽게 저절로 스르륵 닫히는 만족스러운 느낌도 느낀다. 거실로 나가 욕실 앞 휴지 전용 박스를 열어 휴대용 티슈를 하나 집어 빈 앞 지퍼에 넣고 지퍼를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닫는다. 귀에는 링크 버즈, 손에는 손가락 없는 장갑, 머리에는 털모자, 목에는 목도리를 두르고 따릉이 대여소로 향하며 다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영: 다운! 긴급. 일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어제 마트 갔다가 내 인생 레드와인 찾음.

다운: 오!! 이름이 뭔데? 어떻게 찾았어?

인영: 오면 알랴줌. 대존맛. 아무래도 이마트 와인 귀신한테 홀린 것 같아......

다운: 이와귀??????? 떡볶이 사갈까?

인영: 아니 기름 많은 거, 간 덜된 거랑 먹어야 돼. 집에 뭐 많아. 그냥 와!


하루 만에 다시 이마트로 돌아온 인영은 오전 12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와인 매대로 직행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어제의 판촉사원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다. 정말 다운말대로 백수의 돈을 탈탈 털어가는, 와인을 점지해 주는 이마트 귀신이었나? 인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와인 매대에 접근할 때부터 따라붙었던 다른 판촉사원은, 인영이 무엇에 홀린 듯이 매대에 남아있는 같은 와인 6병을 2병씩 3개의 에코백에 쓸어 담았을 때 야릇한 미소를 띤 채, 다른 고객에게 다가가 판촉을 시도했다. 양쪽 어깨에 각각 2병씩 매고도, 바구니에 2병 더 와인을 실은 채 호기롭게 따릉이를 타고 집으로 룰루랄라 돌아오던 인영은 이걸로 올해 겨울을 날 것이라고 따릉이 위에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2달 후 인영은 첫 번째 와인이 할인이 종료되고 다시 28,000원이 된 것을 깨닫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몇 병 더 사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그 길고 깜깜하고 조용했던 겨울의 마지막 7병째 같은 병을 꺼내며 다시 한번 그 판촉사원 선생님 귀신과 만나게 될 날을 두 손 모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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