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시경과 와인 귀신 4

이마트 와인 귀신 '이와귀'

by 춥다물

오랜만에 바구니를 하나 들고 느린 카트들 사이로 재빠르게 지나간다. 동네에서 제일 큰 이 이마트에 바지락이 어디 있는지 파격 할인 매대가 어디 있는지, 와인 할인 매대가 어디 있는지 인영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다. 오늘은 와인 매대로 곧장 간다. 그대로 직진하는데 갑자기 찬 공기에서 따뜻한 공기로 바뀌면서 인영의 코가 다시 간질간직 해지기 시작했다. 마스크 안의 인영의 입이 느리게 벌어지고 고개가 슬로 모션으로 젖히고 눈이 동시에 감기는 와중에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찾아 옷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에에취히이”

지나던 사람들이 시선을 멈춰 보지만 곧이어 다들 각자의 최애 매대로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인영도 와인매대 측면 스페셜 코너의 [하반기 특가 할인]이라고 적힌 큰 사인물 아래에서 옆에 큰 상자에 같은 와인병을 빈자리에 채우고 있는 판촉사원 뒤를 지나 매대 정 중앙에 선다.

매대 한 줄을 앞뒤로 채우고 있는 와인 매대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훑으며 미끄러지기를 5분 넘게 반복하고 있는 인영을 보고 하얀 면장갑을 낀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포갠 50대로 보이는 판촉사원이 인영 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뭐 찾으시는 와인이 있으세요?”

나 좀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인영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지 않은 채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니요. 그냥 좀 둘러보고 있었어요.”

“네 (미소) 그럼 천천히 보시고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힘들지 않게 포기시켰다고 인영은 안심했다.


그런데 어쩐지 인영은 쉽사리 와인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쇼핑을 할 때 쉽게 고르지 못하고 결국엔 지쳐서 실패하는 일, 그 일이 오늘 일어날 것 같은 불안, 다시 동원 슈퍼 와인을 사게 되고 또 소스칸으로 강등하게 되는 멍청함. 이 순서로 같은 상황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십여분을 좌우로 지나가는 카트를 미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줬다가 모로 돌아섰다가, 다시 반바퀴를 돌아서 레드와인 방향으로 돌아가는데 매대 끝 스페셜 코너에서 [하반기 특가 할인] 코너 정리를 다 끝낸 예의 판촉사원이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와 '쉿, 알아, 아는데' 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어떤 와인 좋아하시나요?”

인영은 이어폰을 한쪽을 귀에서 빼내며 속으로 고단수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와인이 있냐고 물었다면 딱히 없다고 대화를 잘라냈을 텐데 하며 어쩔 수 없이 우물쭈물하다가 대답을 꺼내놨다.

“아...... 저 원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좋아합니다. 근데 오늘은 레드와인을 사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화이트 와인은 혹시 어떤 맛을 좋아하세요?"

“드라이한 리슬링 맛있게 먹었었어요.”

“리슬링 좋아하시는구나. 지금 저희 매대에 리슬링은 단맛이 있는 것들만 있어서요. 그건 싫으시죠?"

“네. 저도 화이트 와인 쪽 보긴 봤는데 리슬링은 단 것 밖에 없더라고요.”

“혹시 리슬링의 어떤 맛이 좋으셨을까요? 괜찮으시면 제가 고객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와인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빠르지 않은 속도로 필요한 질문만 하면서, 인영이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그래, 나 잘 듣고 있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듯 편안해 보였다. 이마트에 울려 퍼지는 [자~자 곧 시작되는 타임세일! 놓치지 마세요~]하는 한정 세일 안내 방송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오른쪽 고개가 15도 정도 살짝 꺾여 인영 쪽으로 살짝 더 가까이 왔다. 이렇게 잘 들어주는 판촉사원이 있었던가? 인영은 한쪽의 이어폰을 빼고 대답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방의 리슬링이었는데, 달지 않고 묵직한데 시큼한 맛은 적고 부드러운 맛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아유, 잘 기억하시네요. (미소) 본인이 어떤 맛을 좋아했었는지 상세하시고 알려주시면 저희가 추천해 드리기 정말 좋아요. 드라이하지만 부드러운 리슬링이라, 그럼 레드와인 쪽으로는......”

매대를 둘러보며 와인을 찾던 판촉사원이 눈높이의 노란색 ‘놓치면 후회’ 카드가 붙어있는 쪽을 훑었다. 어떤 걸 집으시나 인영이 궁금해하던 차에 그는 잠깐 멈췄다.

“잘 할인하지 않은 와인 중에서 이번에 특별 할인이 들어간 것 몇 개 추천해드리고 싶어서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와인이기도 하고요. 추천해드려 볼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요'가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인영은 상체를 꼿꼿하게 펴며 손에 잠깐 들고 있던 이어폰을 판촉사원이 모르게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레드와인도 드라이하지만 부드러운 와인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저 혹시… 이 와인 드셔보셨어요?

“네 맞아요, 아니요”

“할인이 잘 안 들어가는 와인인데, 이번 분기에 할인이 들어갔더라고요. 이 와인이 와인 입문자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은 와인이에요. 저도 와인 공부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이 와인을 정말 좋아했었어요. 지금은 많은 맛이 섞인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한번 보여드릴게요.”

하며 첫 번째 추천 와인 하나를 꺼내 들고 특별 매대로 발길을 옮겼다. 뒤에 남은 인영은 맨 앞 줄이 빈자리의 가격대를 본다. 할인된 가격은 19,000원이었다. '아싸! 세이프'를 속으로 외치며 인영은 점원의 뒤꽁무니를 따라나섰다.

특별 매대 앞의 판촉사원은 먼저 든 와인과 또 다른 와인을, 총 2병을 인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 건 제가 더 나중에 좋아하게 된 종류고요. 조금 더 복잡한 맛이 나요. 저도 처음엔 모든 맛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하나하나 알게 되니까 복잡하게 맛이 어우러지는 것이 너무너무 신기하고 또 그 맛을 알게 되는 일이 정말 재밌었어요. ”

“아 그러시군요. 설명을 굉장히 재밌게 하셔요.”

“호호 감사해요. 근데 제가 고객님은 첫 번째를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이걸 먼저 추천해 드릴게요. 그리고 입맛에 맞으시면 이 세일이 끝나기 전에 많이 쟁여두세요. 어제 오신 분은 10병 가져가셨어요.”

존재를 알 수 없는 어제 온 고객님에게 자신의 몫의 열병을 이미 뺏긴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인영은 차분히 대답했다.

“추천 감사합니다. 기대되네요.”

“그리고 두 번째 제가 정말 좋아하는 종류예요. 와인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긴 하지만, 호호 이 와인이 맛있기까지 저에게도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보통 가격의 반 값에 나온 와인이라 이때 한번 드셔보시길 추천드려요.”

인영에게는 두 번째 와인은 25,000원이었다. 그러나 인영의 손에는 이미 두병의 와인이 들려있었다. 귀신에 홀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때 다시 판촉사원님이 빈틈없이 말을 건넨다.

“고객님, 그리고 비비노라는 어플이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네 저도 쓰고 있어요. 맛있는 와인이 있으면 저장해 놓고요.”

“아 그러시구나. 저 와인 공부할 때 손으로 다 적었었는데 세상이 참 좋아져서 그런 게 나왔더라고요. 호호호, 그거 잘 쓰시는 방법이 있는데, 제가 좀 알려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주세요. 다 알려주세요.”

“호호, 대단한 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이 와인”

판촉사원이 첫 번째 와인을 가리키자, 인영이 들고 있던 와인 중 다른 한 병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와인병 엉덩이를 받히고 다른 손으로 등을 받히며 공손하게 판촉사원님이 잘 보이게 들어드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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