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시경과 와인 귀신 3

레드 와인을 부르는 초겨울 공기

by 춥다물

잠 환경에 민감한 인영이 이사하고 제일 처음 한 일은 사방으로 난 집 창에 블라이드와 암막 커튼을 다는 것이었다. 안 방의 암막 커튼을 젖히고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면 7시였다. 어쩐지 회사에 다닐 땐 7시 30분에도 울면서 일어났던 것 같은데 인영은 퇴사 후 알람은커녕 핸드폰도 거실에 두고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아침 7시에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그렇게 상쾌하게 방에서 나오면 크지 않지만 동, 남, 서 세 방향으로 창이 나 있는 주방 겸 거실이 있다.


아침 7시 제일 먼저 동쪽으로 난 창의 블라인드를 연다. 그럼 푸르도록 하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쑤욱하고 거실로 들어온다. 잠들어있던 창가의 화분들이 잎을 하나하나 펼쳐서 볕에 말린다. 밤새 말려있던 잎들이 인영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활짝 펴져있는 걸 보면 요망하고 기특했다.

차를 내리고 후후 불면서 홀짝 들이키면서 인영은 생각한다. 오늘은 또 무얼 만들까. SNS의 요리 천재들의 피드를 넘기며 시간이 제일 많이 걸릴 것 같은 것 위주로 저장하기를 누른다. 머릿속으로 제철인 가을 무로 만드는 설렁탕집 깍두기를 재워 놓고, 가을 사과로 만드는 사과 파이를 버터향이 가득 나게 구워 아랫집에 나눠 주고, 남은 무로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베타라즈케도 만든다. 이건 일주일이 걸리니까 사이사이에 사워도우 브레드도 만들고, 브리오쉬 식빵도 구워야지. 그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겠지? 찻주전자의 차가 거의 바닥을 보이면 냉장고를 한번 열어보고 무엇이 없는지 확인하고 돌돌이로 거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모은다. 다시 앉아 한참을 검지로 피드를 넘기던 인영은 달걀 없이 만들 수 있는 빵으로 결정했다. 오늘은 치아바타를 구울 것이다. 3시간 정도만 휴지 시키면 되고 30분마다 접어주면 돼서 다른 일을 하면서 만들기 좋은 빵이었다. 필요한 재료들을 계량해서 반죽이 뭉치지 않게 잘 밀가루를 체에 거르고 잘 반죽해 준다. 1차 숙성을 위해 천으로 반죽을 덮어 두고 바닥에 흘린 밀가루를 꼼꼼히 닦아낸다. 타이머를 맞추고 보니 10시다.


인영은 이제 남쪽으로 난 제일 큰 창의 블라인드를 창 끝까지 올린다. 따갑게 하얀 햇볕을 거실로 들이고 그 빛으로 화분 받침대아래에 둘 천 깔개를 손바느질할 것이다. 남쪽 창으로 빛이 가득 들어올 때는 밝을 때 할 수 있는 섬세한 일을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너무 한 자세로 굳어있지는 않게 30분마다 일어나 숙성 중인 치아바타를 따뜻한 손으로 깨워 반으로 접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쪽으로 들어오던 볕이 점점 줄어들었다가 서쪽 창으로 빛이 조금 노르스름 익어가는 시간이 오면 손바느질은 중단된다. 자연광으로만 일을 하자는 것이 인영의 다짐이었다. 물론 베이킹이 재미있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몇 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까지 자신을 학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5시쯤 남쪽 창의 볕이 거의 다 사라지고 서쪽의 싱크대 위로 난 가로로 긴 창으로 노랗고 붉은빛이 들어올 땐 인영은 하던 일을 치우고 재빨리 차를 내려 안락의자를 펼쳐 앉았다. 서쪽 창의 해는 가장 아름답고 빠르게 사라졌는데 이때를 인영은 옥탑 매직 아워라고 불렀다. 이렇게 인영은 시간대별로 다른 방향으로 난 창으로 다른 색깔의 볕을 들이며, 매일 비슷하지만 다른 일과 활동으로 잠시 아팠던 자신과 잘 지내보려고, 미안했다고 화해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몇 주간 인영은 ‘명상’ 빵을 끊임없이 굽고 또 구웠다. 빵을 너무 많이 굽고 먹지는 않아서 아랫집, 그 아랫집, 그 아래 아랫집 문 앞에 빵을 정성스레 담아 문고리에 걸어둬야 했다. 오전시간엔 옥탑에서 20여 개나 되는 크고 작은 화분을 보듬고 있으면 어제 빵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아랫집 주인 할머니가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한 손엔 큰 배 한 덩어리를 들고 '인영 씨~집에 있어?' 하시며 가끔 옥탑 계단을 올라오셨다. 그렇게 조용하고 따뜻한 하루하루를 꽉 채워 보내며 해가 지고 나면 가장 넓은 남쪽 창의 커튼 박스에서 스크린을 내려 빔프로젝터로 넷플릭스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긴 드라마를 쏜다. 그리곤 저녁을 만들었다. 용기가 찌그러진 그리스산 올리브 오일과, 유통기한이 임박한 그라노 파다노 치즈, 포장이 뜯겨나간 페퍼론치노. 어쩐지 조금씩 하자가 있는 이 제품들은 반품된 제품만 파는 리퍼브 마트에서 운 좋게 저렴하게 산 것들이었다. 이렇게 인영은 시간과 돈을 바꾸는데 점점 도가 텄다. 여기서 고향에서 보내주신 마늘만 관대하게 넣으면 완벽한 오일 파스타가 완성된다. 여기서 집에서 가까운 동원 슈퍼에서 산 7천 원짜리 와인을 한 잔씩 곁들였다. 와인 한 병을 한 잔씩 일곱 번, 1주일에 나눠서 마시는 유일한 ‘호사’를 누리며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아침에 화분 분갈이를 하러 나왔을 때 기온이 급감한 것을 깨닫고 초겨울에 진입하면서 비염으로 꽉 막혔던 코를 소금물로 오랜만에 뚫고 나서 맛본 와인은 그대로 양념코너로 강등당했다. 그때부터였다. 잠에서 깨어난 인영의 코가 매일 현관문을 열고 화분을 옮기며 바깥공기를 들이켤 때마다 묵직하고 부드러운, 하지만 달지 않은 좋은 레드와인의 향을 그리워하는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이어진 것은. 며칠을 참다가 안 되겠다 싶어 오랜만에 따릉이를 타고 제일 가까운 대형마트에 가서 딱 한 병만 사 오자고 다짐했다. 정말 딱 한 병만.


따릉이를 모시러 가는 길에 친구 다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운: 뀐~ 이제 몸은 괜찮아?

인영: 다운타운! 응 완전. 신기하지?

다운: 야 진짜 퇴직이 만병 통치약이구나.

인영: 어 진짜였어. 약효가 제대로야! 나 근데 이제 따릉이 타고 오랜만에 와인 사러 감. 이따 연락해도 돼?

다운: 알았어. 백수 누릴 수 있을 때 누려라! 차조심하고

인영: 옹. 회사 조심하고!

다운: 미친, 또 연락할게!


마지막 카톡으로 다운을 잘 안심시킨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인영은 내가 지금 동굴, 지옥 말고 옥탑방에 있음을, 심지어 잘 있음을 다운에게 성공적으로 알리고 따릉이를 타고 찬 공기를 가르며 내달린다. 오랜만에 큰 마트를 가는 길이라 생각해 준 파스타면과 새로 나온 라면 그리고 제일 중요한 좋은 와인 한 병을 사기로 했다. 인영의 와인 예산은 2만 원이었다. 일주일 식비를 5만 원씩 쓰는 중이라 와인은 예산의 중요한 실패요인이 될 수 있었다. 건조한 공기가 코안을 바짝 마르게 했다. 코가 따가워질 만큼 건조해지자 잠깐 벗었던 마스트를 다시 썼다. 페달을 열심히 밟아 더 잦아진 입김으로 코를 조금 진정시켰다. 이마트에 다다라 구멍이 뚫린 오른손 검지로 핸드폰의 따릉이 앱에서 임시 잠금 버튼을 누르니 잠시 후 철컹하고 자전거가 잠겼다. 인영은 마트로 위풍당당하게 입장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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