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시간
투명한 유리칸막이로 된 사무실 중앙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박소장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구팀장 왜 그래? 구팀장 지금 일 제일 많은 거 우리 다 알지, 근데 지금 제일 바쁠 때 그러면 우린 어떡해."
라고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 박소장은 우는 소리를 했다, 인영이 말했다.
"소장님 저 혈변을 봐요."
"왜 그래? 구팀장. 나도 진짜 피똥 싸고 있어. 구팀장. 자, 잠깐, 말 그대로… 피. 똥?"
박소장은 잠깐 멈칫하더니 하더니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글은 은유고 한자는 병명이 된다는 게 조금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웃어버리지 않고 인영이 어제 항씨와 단둘이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이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고 얼마나 지속되어 왔는지,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혈변을 보면서까지 회사에 다녀야 할 이유를 자신은 아직 못 찾았으며, 내 건강을 먼저 회복하고 싶다고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박소장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박소장도 천천히 단어들을 조합했다.
"후아...... 꽤 오래됐군요. 그래 몸 아프면서 까지 다닐 회사는...... 없지. 없는데 내가 아쉬워...... 구팀장...... 없으면...... 도서관 프로젝트는 어쩌나...... 암튼 뭐...... 후아......"
인영은 박소장의 단어 사이의 수많은 말 줄임표의 가상의 점점점을 89개까지 속으로 세다가, 자신이 할 말은 여기 까지고 3주 조금 더 남은 이 달 말까지 다니겠다고 선언하고, 남은 휴가와 야근으로 채운 휴일을 계산해서 며칠까지 나와야 하는지 다시 상의하시자고,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먼저 회의실에서 나왔다. 조용히 한 대화라 밖으로 들리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사무실 내 사람들이 눈치챈 듯이 사무실의 공기가 회의실로 들어갈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인영은 어제 쏟아진 업무 이메일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유리 회의실을 등진 자리의 인턴 우정이 자신의 컴퓨터 스크린에 반사된 뒤의 박소장이 손을 휘젓고 있는 것을 빨리 눈치채고 뒤돌아 봤다. 박소장의 손의 끝이 홍소장에게 가 있는 걸 알아채고 소리쳤다.
“홍소장님, 저 지금 박소장님이 부르시는 것 같은데요?”
“뭐야 어디서? 어디로? 뭐 전화 왔어?”
“아뇨, 저 뒤에 회의실.”
“어유 윤형씬 참 귀도 밝아. 난 나이 먹어서 이제 귀도 잘 안 들려. 허허”
“귀가 밝은 게 아니라......”
맞은편에 대각선에 앉은 인영이 우정을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눈치 빠른 우정은 홍소장과의 대화는 일절 쓸데가 없다는 것을 사수 인영으로부터 습득하고 네모 유리실험실 안에 갇힌 듯한 박소장을 뒤돌아보며 ‘내가 너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에게 맞게 전달했다’라는 사인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박소장의 한참 울상이던 얼굴은 나이는 막내지만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인턴 우정을 향해 쌍 따봉과 함께 1초 정도 활짝 밝아졌다가 쌍 따봉을 내리면서 다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회의실에 들어갔던 홍소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지금 말이 돼요. 그게?"
"홍소장 목소리 낮춰."
"아 박소장니임. 피똥? 아 진짜. 여기 지금 피똥 안 싸는 사람이 어딨어? 정말, 장난하나."
"아니 혈변."
"네???...... 진짜 피똥이요?"
라는 대화를 두세 번 반복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홍소장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회의실 안의 고기압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회의실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인영은 달아오르는 귀를 애써 무시했다. 모두가 간신히 키보드 치는 소리를 내던 것도 이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듯 순식간에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모든 귀는 회의실을 향해, 모든 옆눈은 인영을 향해 있었다. 무거운 공기를 망토처럼 휘감고 있던 홍소장이 인영 쪽을 한번 바라보고 한숨을 내 쉬더니 고개를 돌려 ‘어, 김팀장 잠깐 들어와 봐’ 하며 김팀장을 데리고 다시 들어갔다.
연이어 ’네에?’ 하는 소리가 난 후 꼭 ‘아니 혈. 변.’이라고 조용히 강조하는, 그러나 다 보이는, 박소장의 입모양을 보며 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혈변이라고 말할 것이지. 저 새끼 지금 즐기는 거야.'
회의실 안의 세 명이 모두 동시에 후아하고 한숨을 내뱉더니 홍소장이 뒤돌아 인영의 자리 쪽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인영은 홍소장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굳게 닫고 씁쓸히 웃어 보이고 다시 컴퓨터 스크린 아래로 몸을 자연스럽게 숙이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속삭였다. 시발새끼.
당연하고 허망하게 2-3일에 한 번씩 있던 혈변이 다음날부터 바로 사라졌다. 당연하고 당당하게 남은 3주를 인영은 웃는 얼굴로 회사에 나왔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연차계산기 엑셀파일에 차곡차곡 야근 시간을 입력해 놓은 탓에 저절로 생긴 휴가가 19일이 넘어갔다. 그렇다면 당장 오늘부터 나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 할지 몰라 이 상황을 박소장에게 전달하고 상의해보자고 하고 2시간 후, 박소장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람 구하고 인수 인계할 수 있게 이번달까지는 나와주세요. 구팀장. 남은 휴가는 다음 달로 전부 넘기고 다음 달 월급까지 받아가면 구팀장한테도 좋을 것 같아요. 이게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시간을 들여 쓴 것 같은 메시지가 인영의 마음을 움직였고 또 한 달 치 월급이 크게 고마워질 때도 있을 것 같아서 인영은 3주 후인 말일인 목요일까지 나오기로 합의를 했다.
인턴 우정은 ‘아 구팀장님 가시면 저는 어떡해요. 힝’ 하면서 애살스럽게 굴었지만 우정은 인영이 제일 마지막으로 걱정하는 팀원이었다. 2주 후 회사는 3번의 면접 후에 인영과 비슷한 또래의 디자이너를 어렵게 채용했다. 인영은 인수인계를 하고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없던 사람처럼 개인 흔적을 지우다가 사실은 흔적을 조금 더 깊고 진하게 남기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료 정리 방식, 프로젝트 날짜 별 상황, 미래 해야 되는 성과, 내역비교, 협력업체 리스트 그리고 회의록, 메일등이 모두 정리되어 있는 구글 시트, 회사 매뉴얼이 없어서 인영이 만든 인턴 지도 매뉴얼, 마찬가지인 연차 계산식이 들어있는 엑셀 파일을 전체 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공유하면서 말이다. 인영은 매번 '구팀장 그 파일 위치가 어디 있지?', '그거 뭐더라 그거 있잖아.'라고 스무고개를 시작하던 홍소장을 떠올리며 메일 제목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공유드립니다.’라고 썼다가 휴 한번 긴 숨을 내뱉고 ‘구인영 인수인계의 건’으로 다시 바꾸고 메일을 전체 전송했다. 인영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너무 잘 알아서 후련하고 섭섭한 7년의 생활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일과가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인영의 그놈의 피똥 다시는 안 싸려고 하는, 직장 외 시간 말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유로 혈변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이때의 인영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