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시경
오랜만에 집을 나서기 전 인영은 붙박이 장 오른쪽 슬라이딩 문을 밀어 맨 아래 선반에 차곡차곡 접어 높은 에코백 두 개를 빼 앞으로 맨 동전가방에, 그 윗 선반의 맨 앞 손수건을 꺼내 뒷 주머니에 넣는다. 더 챙길 것이 없는지 생각해 보고 중지로 튕기듯이 문을 살짝 민다. 부드럽게 저절로 스르륵 닫히는 느낌이 만족스럽다. 거실로 나가 욕실 앞 휴지 전용 박스를 열어 휴대용 티슈를 하나 집어 빈 앞 지퍼에 넣고 지퍼를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닫는다. 콧물을 닦아낼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귀에는 링크 버즈, 손에는 손가락 없는 장갑, 머리에는 털모자, 목에는 목도리를 두르고 따릉이 대여소로 향한다.
인영은 면목동에 위치한 자신의 옥탑방에서 자급자족하며 지낸 지 한 달이 넘어갈 때까지 반경 2킬로 너머로 나온 적이 없다. 회사에서 하루 18시간을 넘게 보내며 지냈던 세월에 보란 듯이 집에서 가능한 한 24시간을 다 채워서 보냈다. 그러다 조금씩 반경을 넓혀서 채소나 두부를 사러 동원시장에 가거나 찬 바람을 쏘러 따릉이를 타고 한두 시간씩 배회하는 날을 제외하면 십중팔구 집에서 잠옷차림으로 무얼 만들고 손을 움직이면서 앉았다 읽어 섰다 반복했다. 그러다 이렇게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 비장하게 콧물 대비, 음악 세팅, 에코백 장전 후 따릉이 대여소 이용가능 따릉이 대수 추적까지 끝낸, 오늘같이 커다란 마음을 먹은 날은 정말 퇴사하고 2개월 반 만이었다.
지난해, 얼굴에 표정이 점점 없어지는 인영을 눈치챈 오랜 친구들 중에 누구는 그게 바로 번아웃이라며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라 했고 누구는 씨발 좆같은 새끼들이네라고 같이 흉을 봐줬다. 직장 내시경 한번, 수면마취 대장내시경 한번 이렇게 두 번을 개인사정을 사유로 반차를 쓰며 찾아 간 병원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을 두 번 듣고 나서 인영의 머리는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어떻게 염증이나 다친 곳이 없는 몸에서 출혈이 있을 수 있는지 인영은 한참 생각해 봤다. 그게 갑자기 마우스를 잡은 손등에서 피가 난다거나,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귀에서 피가 분수같이 쏟아지는 방식이라면 회사에서 이것 좀 봐라라고 쓸데없이 티 라도 낼 수 있을 텐데. 똥구멍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같았다. 인영은 팀장직을 달고 점점 업무가 많아져 밤 10시에 퇴근을 하고도, 내 하룬데 내 시간이 하나도 없는 것이 화가 나 밥을 거르고 화분을 뒤집어엎어 분갈이를 하고 빵 반죽을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시기가 이른 화분 분갈이를 하면서, 다 먹지도 못할 사워 도우 브레드를 치대면서. 남몰래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의 항문에게 말을 걸었다. 헤이… 이유가 뭐야? 왓 두유 원?
항씨는 대답이 없었다.. 피가 흘러나온다는 것 말고는 통증도 없고 다른 특이점도 없었다. 첫 방문했던 항문외사의 의사가 피 색이 어땠냐고 물었다. 혈이 밝은 색이면 항문과 가까운 직장에서 출혈이 생긴 확률이 높고 혈색이 어두우면 그 외 대장 등에서 출혈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해서 인영은 얼마나 새빨간 피였는지를 설명했다. 마치 앵두 같은. 의사는 비교적 간단하고 수면마취가 필요 없으며,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직장 내시경이 있다고 했다. 인영은 반차를 쓴 김에 바로 진행해 달라고 했다. 당일 직장내시경용 관장약을 데스크에서 받아 들고 화장실을 5번 갔다 와서 바로 진행된 직장내시경은 인영에게 이건 맨 정신에 하는 게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카메라가 항문주위에 난 털을 헤집고 항문으로 쑤욱하고 순식간에 들어갔다. ‘읍!’ 인영은 어른이 된다는 건 울다가 웃게 된다는 뜻일까 라는 난데없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며 동시에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당황스러웠다. 인영은 새우처럼 모로 공손하게 누워 자꾸 고개 바로 하고 스크린을 똑바로 보시라고 로봇처럼 한 음으로 반복해서 얘기하는 간호사와, 카메라를 자신의 항문에 쑤시고 있는 의사, 이렇게 셋이서 사방으로 둘러 쳐진 커튼 안에서 함께 보내는 3분이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자신의 항문과 직장을 관찰했다.
"환자분 여기 보셔요. 자 여기 보이시죠. 안에 정말 깨끗하고요. 출혈이나, 다른 특이점은, 환자분 여기 보셔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3분이 지나고 의사가 먼저 떠난 방에 간호사와 둘이 남았다. 새우 자세를 하고 있어서 왠지 자신이 더 초라하다고 느껴지는 찰나 직장을 팽창시키기 위해 주입했던 가스 때문에 내시경 카메라를 빼고 난 인영의 항문에서 피슈—하고 가스가 배출됐다. 간호사는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겨, ‘이제천천히일어나셔서밖에나가서옷갈아입으시고앉아서기다리실게요.’ 라고 말하고선 급히 커튼을 열어젖히며 복도로 내달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하소연할 데 없는 이 당황스러운 현실을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지, 너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래?’라고 대답이 없는 항씨에게 괜한 신경질이 날 때. “구인영 씨, 2번 방으로 들어가실게요."라고 간호사가 소리쳤다.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고 총총걸음으로 똑똑 노크 후 2번 방문을 열었다. 자신의 항문에 카메라를 욱여넣었던 의사 선생님이다. 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수치심이 인영을 뒷걸음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선, 선생님”
“(미소) 좀 불편하셨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보시면, 직장이 정말. 깨끗하셔요. 직장 내 출혈은 아니라서, 대장 내시경도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대장 내시경도 깨끗하게 나올 경우엔 스트레스성 일시적 현상일 수 있어요. 간혹 있는 일입니다. 대장 내시경은 작년에 건강검진 때 하셨다고 별 이상이 없을 것 같긴 한데 혈변을 수차례 보신다고 하니 빨리 날짜를 잡으시죠.”
3일 후 토요일 오전으로 예약한 대장 내시경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수면대장내시경이었지만, 토요일이라 근처에 사는 여동생을 부를 수 있게 됐다. 인영의 마음도 한결 편했다. 결론은 스트레스 신체증상. '스트레스 유발 사유를 줄여 보시고 그래도 혈변이 지속될 경우 다시 한번 병원을 방문하라'는 말을 같은 의사에게 들었다. 두 번째 방문한 항문외과의 병원문을 터덜터덜 힘 없이 나오면서 혈변을 보면서 까지 어떤 회사에 다닐 이유가 ‘나 하나 먹여 살릴 돈을 버는 것’ 밖에 없다면 그게 아주 미련한 짓이라는 결론을 냈다. 인영은 속으로 항씨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로 아파서 돈을 못 벌게 되기 전에 내가 다시 회복할게. 그동안은 그까짓 돈 안 벌고 안 써 알겠지? 항씨? 내가 잘 돌봐줄게. 걱정하지 마.’
다음 날 인영은 점심시간 지난 후 잠깐 이야기하자고 대표에게 면담신청을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