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매드
*영어대화는 나눔 고딕체 사용
희진은 정신을 붙잡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 죄송해요. 잠시만요, 정말요? 근데 선생님도요?”
“그럼요, 저도요.”
“선생님은 북한 억양이 전혀 없으세요!”
“저는 영국으로 오기 전에 서울에서 5년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말을 빨리 배웠다는 얘기는 몇 번 들었습니다."
미소 가득했던 영옥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영옥이 입술을 한번 매만지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저희는 여기에서 싸우스 코리안으로 살아요. 영국인들은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거든요. 근데 한국사람들은 너무 잘 알죠. 그래서 부모세대들은 남한, 북한 모두 서로 어울리기 싫어하고요. 남한에서 이민 와서 영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재원이거나, 자녀 교육을 위해 온 사람들이고, 영국에서 외국인 학비가 더 비싼 것 아시죠? 배경이 저희랑 많이 달라요. 우리 애들 학교에서도 남한 부모들이 아이들한테 북한 말씨 쓰는 애들이랑 같이 놀지 말라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북한 말씨 못 쓰게 남한 말씨를 가르치려고 선생님으로 서울말을 쓰는 워킹 홀리데이로 온 분들만 찾는 거예요. 워킹 홀리데이 오신 분들은 대부분 영국에 연고가 없이 혼자 오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남한 학부모들과는 만날 일이 없고요.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저는”
“희진 선생님!”
희진이 다시 입술을 떼려고 하자 영옥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결정하지 않으셔도 되니 조금 더 생각해 보세요. 희진쌤이 괜찮으시면 저는 희진쌤이 초급반 맡아주시면 좋을 것 같거든요.”
희진과 영옥은 파인트를 하나씩 더 마셨다. 영옥은 이번엔 라거를 마시겠다고 했다. 'IPA 후에 라거를 마시면 맛이 없을 텐데' 하고 희진은 생각했지만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알은체는 말았다. 희진은 어쩐지 두 번째 파인트가 들어가자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남과 북을 가로지르던 대화를 동과 서로 크게 그 각도와 범위를 변경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온 나라(들)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들과 갖가지 해산물. 그중에서도 파래김, 고사리나물, 깻잎장아찌, 들깨수제비, 꼬막찜 같은 대단하고 소중한 것들, 그래서 가봤던, 런던에 있는 비싸기만 하고 맛없는 한식당, '실례한다'는 말의 따뜻함과 그 뒤에 따라오는 내 까만 눈동자에 와닿는 서늘한 눈, 그리고 섬나라임에도 너무 비싼 영국의 신선한 해산물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영국 음식들, 바로 동양인으로서 보는 영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흙탕물 같다고 생각했던 영국식 홍차를 이제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는 데에선 영옥과 희진은 '어머' 하며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희진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한국 사람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지만 때때로 자신이 북한에서 탈출한 스파이와 얘기 중이고 그 스파이를 미행하던 러시아 요원이 반대편 카페에서 차가운 오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우리를 염탐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희진은 등골이 오싹해져 왠지 맥주잔을 빨리 비워버렸다.
희진과 영옥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펍을 나와 가볍게 포옹을 했다. 발그레한 두 사람의 오른쪽 볼이 영국식으로 스치고 다시 한번 한국식 목례로 숙여졌다. 영옥은 인사 후 기차역 방향으로 멀어지는 희진의 뒷모습을 보며 주저하다 소리쳤다.
"희진선생니임! 생각해 보고! 하시던 안 하시던 문자 꼭 주세요!"
희진은 뒤돌아 90도로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 뉴몰든 역으로 발길을 돌려 가로등빛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개찰구를 지나는 희진의 머릿속은 IPA와 평안도와 난민비자로 뒤죽박죽이었다. '북한 말투가 하나도 없다니, 티브이에 나온 새터민들은 억양이 정말 강하던데, 런던이 두 번째라고? 그럼 세 번째는 어디지?' 런던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차에서 희진은 스쳐 지나가는 기찻길 옆 나무와 집들을 멍하니 흘려보냈다. 평양이 평안북도인지 평안남도인지를 생각하다가 자신이 이어폰을 꽂고 있지 않았다는 걸 주머니에 넣은 손에 이어폰이 만져져서야 알았다. 현대인이 이어폰 없이 대중교통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혼자 피식하면서 마지막 종착역인 워털루역에 내렸다. 출구 게이트에 오이스터(교통카드) 카드를 접촉시켰을 때 삐-삐 하고 굉음이 나자, 바로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차츰 반쯤 나간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때 역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너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오이스터 좀 보여주겠니?”
“안녕. 나 분명히 뉴몰든에서 카드를 찍고 들어왔는데 카드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오이스터.”
“아. 여기.”
차가운 얼굴로 단말기에 희진의 오이스터 카드를 찍어 보던 역무원이 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다행히 너의 오이스터는 멀쩡해. 그러나 불행하게도 네가 승차할 때 카드를 찍지 않았다고 나와. 미안하지만 너에게 8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할 거야.”
희진은 당황했지만 얼른 80에 17을 빠르게 곱했다. '팔칠에 오십육. 팔 더하면... 백삼십육? 13만 6천 원???'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희진은 격분했다.
“뭐라고? 난 분명히 찍었어! 개찰구 기계가 뭔가 잘 못된 걸 거야! 믿어줘 난 한 번도 돈을 안 내고 기차를 타본 적이 없어! 이건 불공평해! 아! 뉴몰든역에 전화해 봐! CCTV를 보라고 해! 난 하이 스트리트 방향에서 탔고. 시간은!”
“하하 난 너 같은 사람들을 매일 봐. 게다가 오늘 시간도 아주 많고. 이 논쟁을 밤 새 할 수도 있지. 어때? 해볼래?”
희진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눈높이에 있는 그의 가슴팍에 배지를 봤다. 모하매드라고 적혀있었다. 모하매드는 한 손에 카드 리더기를 들고, 같은 방향의 다리로 짝 발을 짚으며, 런던 교통 공사의 네이비색 유니폼에 빨간색 배지를 달고, 배지 높이의 까만 머리의 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스타카토로 점차 높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희진과 역무원을 혹시 못 보고 지나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게이트를 빠져나가면서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서늘한 눈빛들이 한 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희진은 이 논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하...... 알겠어. 어떻게 내면 되는 거야?”
“오 좋아. 자 여기에 너 인적사항을 적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신분증도 보여주고. 네가 나중에 이 종이를 직접 들고 가서 내는 거야. 20일 내에 내지 않으면 과금이 되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희진은 오이스터 카드가 들어있던 카드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모하매드에게 건네고 그가 내민 벌금 종이에 인적사항을 한 줄씩 써 내려갔다.
당신은 부정 승차로 인한 벌금을 £80 부과받았습니다. 휴일을 제외한 법정근무일 20일 이내에
런던 법원에 방문하거나 온라인으로 결제하는 방법을 아래에서 확인하십시오.
성명: 희진 킴
생년월일 : 1일, 8월, 1990녀
모하메드가 짚은 짝발을 반대로 바꾸고 휘파람을 불며 희진의 신분증에 적힌 스펠링을 확인한다.
“근데 뉴몰든엔 왜 간 거야?”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갔어.”
희진이 모하매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자신의 왼손바닥으로 종이를 받치고 계속 써내려 간다.
주소: 플랏 6a, 23, 스크ㄹ
모하메드가 희진의 신분증 표면에 여러 방향으로 빛을 반사시켜 본다
“한글을? 뉴몰든에 사는 영국인 아이들이 한글을 배운다고? 흥미롭네.”
“걔네는 한국인 2세야.”
“한국인이라고? 남한? 북한?”
희진이 쓰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말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흠… 그래 북한 사람들이 여기 있을 리가 없겠지. 자 마저 적어.”
직업: 건축ㄱ
“건축가?”
“응.”
“정말? 네가?”
“이 시발새끼가 진짜”
“뭐라고 했니?”
“다 썼다고. 자 됐지?”
희진은 모하매드에게 그 아이들은 북한 아이들 이라고는 얘기하지 못 한 채, 영옥이 비밀은 아니라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만 얘기해야 될지 모른 채, 80파운드 아래에 제 이름, 생일, 주소, 건축가가 적힌 벌금 딱지를 한참 서서 바라봤다. 그는 런던에서 가장 바쁜 역 중에 하나인 워털루역 안에 얼음처럼 굳은 지 5분 여가 지났을 때쯤 벌금 딱지를 마구 구겨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반대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영옥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잘 들어가셨죠? 오늘 맥주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다음 주엔 제가 맥주 사겠습니다. 토요일 첫 수업 때 봬요. 희진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