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한글학교 1

영국사랑영국

by 춥다물

영국의 써레이 지방의 뉴몰든. 런던에서 30분 정도를 기차를 타면 테니스경기로 유명한 윔블던을 지나 도착하는 코리아 타운. 그곳엔 토요일마다 한국인 부모를 둔 어린이들이 모이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토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 뉴몰든 하이스트리트를 따라 검은 머리의 아이들의 작은 운동화를 신은 발들이 둘, 넷 씩 모인다. 한 시간 전 이미 희진은 항상 30분 전에 도착할 수 있게 런던의 집에서 일찍 나섰지만, 뉴몰든 역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영국이민상담환영’, ‘이모네’, ‘케이타운 바비큐’ 같은 한글 간판들에 흥분하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걷다 보면 나오는, 배추, 참깨 라면, 당면 같은 한국 식재료를 파는 ‘서울플라자’ 나, 김치찌개 냄새가 새어 나오는 한식당 ‘하루’ 앞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나느라 매번 마지막 10분을 남기고야 교회로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희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교회 다목적홀로 들어가기 전 크게 심호흡을 세 번 한다. 무거운 철문을 열면서 일주일 동안 쓰지 못했던 그의 언어. 한국어로 크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항상 제일 먼저 도착하는 영옥 선생님과 그의 6살 딸 호은, 8살 아들 영웅이 가벼운 간이 테이블을 펼치다 상체만 반쯤 돌려 환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희진쌤!"

희진도 얼른 가방을 원목 마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호은 쪽으로 달려가 가벼운 테이블을 번쩍 든다.

“죄송해요! 일찍 출발해도 뉴몰든에만 오면 제가 정신을 놓고 구경하게 되네요.”

“호호, 늦지 않으셨는데요 뭘. 근데 한국이 그리우신가 봐요. 선생님.”

"힝"

희진은 잠시 어리광을 피운다. 하지만 이내 밝은 얼굴로 책상을 나른다. 이 토요일만 열리는 한글학교는 직접 책상도 날라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지는 임시 학교지만 교사, 학생, 학부모 할 것 없이 모두들 웃는 얼굴로 기꺼이 손을 거든다. 이렇게 하나둘씩 모인 작은 고사리 손들이 5개의 접이식 테이블과 30개의 접이식 의자를 모두 펼치면 주말 한글학교가 시작된다.


희진이 영국에 2년 동안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기 전에 오랜만에 친구 여름을 판교에서 만났다. 여름이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스타벅스에서 시간당 2만 원씩 받고 일했던 이야기 하다가 ‘아 맞다.’ 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지금 링크 하나 보냈어. 여기 영국한인 홈페이진데, 구인, 구직 등 정보 되게 많을 거야.”

“04uk.com? 영국 사랑 영국인 거야? 뭐야 콩글리시.”

둘은 키득키득 웃었다. 여름은 나중에 고맙다고 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희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커피를 다시 홀짝이며 가기 전에 뭘 준비해야 할지 물으면서 홈페이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후 영국에 도착해 처음 3개월 동안 38개의 이력서를 내고 나서야 마침내 건축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희진은 '내가 지금 영국까지 와서 무얼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한인 커뮤니티 홈페이지의, 90년대의 한국에 멈춰있는 듯한 디자인 위에 흩뿌려져 있는 명조체의 한글을 붙들고 엄마, 아빠, 멍멍이, 친구들, 깍두기, 안동 찜닭, 찜질방 같은 것들을 그리워했다. 수십 번의 새로고침 후에, 희진은 ‘[구인] 소호 한인식당 보조 구함’, ‘[집] 핀칠리 로드 플랏메이트 구함(최소 6개월)’ ,’[구인] 명품 구입 알바 건당 £20’ 사이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구인] 뉴몰든 한겨레 한글학교 선생님을 모집합니다.


뉴몰든, 써레이에서 4살부터 14살까지의 다양한 연령의 한국 이민자 2세들에게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쳐 주실 분을 찾습니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은 없어도 되지만 아이들과 놀면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쳐 주실 분이면 합니다. 다만, 서울 표준말을 쓰고 매주 토요일에 빠지지 않고 6개월 이상 하실 분을 찾습니다. 가까이 거주 중인 분을 선호합니다. 아래 번호로 전화 주시거나 카카오톡에서 [ok19**] 찾아서 말 걸어주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영옥 (한겨레 한글학교 교사 070448 *****)


희진은 바로 본문에 나와 있는 영국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영옥은 역시 서울말로 간단히 인사 건넸다. 희진에게 나이, 하는 일, 영국에 머물 일정을 물어보고 알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서울말을 쓰는 지만 확인한 것 같이 짧고 건조한 통화라고 희진이 생각하던 찰나 바로 카카오톡 메신저로 메시지가 왔다. 영옥은 희진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고 싶다고. 시간 약속을 정한 후 워털루 역에서 기차를 타고 뉴몰든에 있는 퀸즈 헤드라는 펍 앞에 갔을 때 멀리서 까만 머리의 아시아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영옥이였다. 메신저 프로필에서도 왜소한 체격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만난 영옥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작은 사람이었다. 커다란 눈에 솟아오른 광대, 그러나 깡 마른 몸이 어딘 지 모르게 희진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크게 느껴지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이기에, 다가가도 저보다 높아지지 않는 영옥의 눈높이와, 그의 뒷배경이 함께 점점 가까워질수록 희진은 이 스케일이 조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이영옥선생님 맞으시죠? 저는 김희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겨레 한글학교 고학년 반을 맡고 있는 이영옥입니다. 희진쌤이라고 부를게요, 저도 영옥쌤이라고 불러주세요. 맥주 한잔 괜찮으시죠?”

"네, 선생님."

둘은 퀸즈 헤드로 들어가 바에서 맥주 파인트(500ml) 2잔을 시켰다. 희진은 영옥이 자신과 같이 IPA 계열 맥주를 시켜 왠지 금새 가까워진 마음이 들었다.

자리를 잡고 영옥은 희진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차분히 해결해 나갔다.한겨레 한글학교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영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그러면 희진도 영옥을 천천히 파악해나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되셨는지, 당신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당신도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비슷한 난이도의 질문과 비슷한 온도대의 대답이 차분히 여러 번 오고 간 후 영옥은 결심한 듯이 맥주가 1/5 남아있던 파인트 잔을 두 손으로 들고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며 잔을 테이블에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내려놓고 말했다.

“희진 선생님. 잘 들으세요. 이건 비밀은 아닌데…… 어디 가서 막 말씀은 하지 마셔요. 저희 한글학교

아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왔어요. 아니지 아니지 북한에서 온 건 오직 엄마아빠들이고, 어떤 아이들은 남한에서, 또 어떤 아이들은 영국에서 태어났어요. 선생님, 런던이 북한 난민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도시인 거 아셨어요? (웃음 후 목을 가다듬고) 놀라셨죠?”

희진은 조금 당황했다. 서울, 부산 어디든 길거리에 스쳐 지나갔던 새터민들이 있었겠지만 자신을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곳 영국 한 복판의 퀸즈 헤드 펍에서.

“아...... 북한에서 오셨구나......”

자신이 뜸을 들이다가 겨우 한 말이 북한에서 오셨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희진은 이를 꽉 물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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