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4

색맹

by 춥다물

펍에서 나와 손을 꼭 잡고 내 옆에서 10분쯤 걸어가던 1번이 자신의 집에 다다랐을 때, 자신만만하게 계단을 앞서 오르는 그의 엉덩이가 여태껏 본 데 없이 씰룩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에게 말을 거는 듯 움직이는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따라 들어간 그의 집은 아주 깔끔했다. 마침 거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던 1번과 같이 사는 친구와 잠깐 어색한 인사를 하고, 1번은 잠시 얘기 좀 하자고 친구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왔다. 어쩐지 그 친구는 먹고 있던 샌드위치가 든 접시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의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서 Slipknot*의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다.

1번은 복도를 지나 맨 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선 방안의 조명을 낮은 조도로 바꾸고 조용하고 따뜻한 노래도 틀었다. 좋은 노래라고 하니 Men I Trust(내가 믿는 사람들)의 Numb(감각이 없는)이라고 했다. 1번의 주도로 우리는 진한 키스를 조금 더 하다가 바로 엉덩이를 깠다. 그것도 내 엉덩이가 아닌 자신의 엉덩이를. 1번은 뒤돌아서 무릎을 꿇고 일어선 채로 내 눈앞에 자신의 엉덩이를 젠틀하게 전시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처럼 매끄럽게 왁싱한 하얀 몸에, 오직 슈퍼테드만이 빨간 망토를 두르고 환한 얼굴로 1번의 오른쪽 엉덩이에서 씩씩하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슈퍼테드 타투를 충분히 당황스럽게 보고 있을 때 상반신만 오른쪽으로 뒤 돌아 당당하게 이 망토 두른 친구만 믿어보라더니 콘돔을 끼고 1분 만에 사정했다.


다음날부터 엉덩이 아니 1번은 매일 저녁 메시지를 보내왔다. 슈퍼테드가 너를 보고 싶어 한다고. 그 엉덩이 히어로의 부름에 내가 매일 밤마다 집에서 나갔다가 아침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엠마가 말했다. 그거 부티콜*인 것 같다고. 부티콜이 아니라고 1번이 얼마나 젠틀하고 다정한지 너는 모른다고 역정을 냈던 저녁. 젠틀한 1번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얘가 드디어 사귀자고 할 거라며 엠마방으로 달려가 호들갑을 떨다 서둘러 양치를 하고 립밤을 바르고 집을 나섰다.


집 앞으로 데리러 온 남자 1번과 집에서 가까운 베트남 식당으로 향했다. 띠링띠리링 차임벨이 촌스럽게 울리며 들어간 곳은 거의 만석이었다. 잠시 후 내가 시킨 따뜻한 새우 팟타이와 1번이 시킨 마사만 카레가 차례로 나왔다. 먼저 시킨 사이공 맥주를 반쯤 비웠을 때였다. 1번이 드디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내 친구 중에 TV 프로그램 PD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번에 연애 리얼리티를 기획했대. 이름은 블라인드 데이트야."

"오 신기하다. 그런 방송들 실제로 사귀는 건지 궁금했었어."

"그지? 나도 궁금했어. 근데 나보고 한번 출연해 보래. 그래서 해보려고!"

응? 한다고? 내가 잘 못 알아 들었나? 리스닝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되는데, 내가 천천히 다시 물었다.

"네가 데이트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했다고? 데이트? 우리가 지금 하는 게 데이트 아니야?"

옆테이블에서 쌀국수를 먹고 있던 커플이 갑자기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작은 베트남 식당의 사람들이 모두 하던 대화를 멈췄다. 1번의 얼굴이 슈퍼테드의 망토처럼 새 빨게 졌다.

"어… 그렇지. 우린 그냥 가볍게 만나는 정도잖아."

"그럼 나랑도 데이트하고 싶고 진정한 사랑도 찾고 싶고?"

"난 네가 괜찮다고 할 줄 알았어."

"씨발 장난해? 팟타이 잘 먹어라. 거기 나가서 너의 평생의 사랑이나 찾아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식당 직원에게 잘 먹었다고 저기 곧 ‘블라인드 데이트’에 나올 애가 계산할 거라고 밝게 인사하고 나왔다. 1번은 벌레를 보듯 자신을 쳐다보던 옆자리의 사레가 들린 커플 중 특히 여자의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손도 대지 못한 음식값을 지불하고 나온 듯했다. 촌스러운 차임벨 소리가 저 멀리 뒤에서 들렸다. 길이 겹치지 않게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축축한 런던의 밤길에서 나는 우하하 많이도 웃었다. 집에 가서 엠마한테 이 젠틀한 개새끼 얘기를 빨리 해줘야 하는데. 한참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갑자기 그 밤하늘의 하얗게 반짝였던 별빛이 파란색인지 에메랄드 색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공기가 갑자기 차게 느껴지고 지금 여기 영국의 런던의 쇼디치 하이스트리트에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다.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붉은색이었다. 붉은 손바닥으로 뺨을 비볐다. 축축한 밤공기가 뺨과 손바닥 사이에서 잠시 버티다가 사라졌다.

"준희!"

눈물을 훔치며 뒤를 돌아보니 오렌과 엠마가 입김을 내뿜으며 내 쪽으로 반갑게 달려오다가 내 얼굴이 공기보다 축축해져 있는 걸 눈치채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잠시 멈추었다가 나를 안았다. 그 품에 안겨서 나는 7살처럼 울었다.

"난 못해. 오픈 릴레이션쉽은 못해. 시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엠마 네 말이 맞았어' 하면서 조금 울고, ' '블라인드 데이트'라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알아?' 하면서 어이없게 웃었다.

"그래서 진짜 나간다고?"

"그렇다니까, 다음 주부터 촬영한대. 미친."

"대박이다. 그래도 '젠틀'하게 먼저 말해주다니? 너무 웃겨."

"다 왜 이런 애들만 걸리는 걸까? 그냥 너무 쉬운 아시안처럼 생겼니?"

옆에서 웃으며 듣고 있던 엠마와 오렌이 동시에 정색하며 말했다.

"워워 준희"

"너무 드라마틱하게 가는데?"

오렌이 상체를 조금 앞으로 당겨 덧붙였다.

"야 이게 색의 문제라고 누가 그래? 아니 그렇다고 치자. 걔네들 둘 다 백인이야?"

"응 둘 다 백인이야."

"봐. 너도 색이 먼저 보이잖아. 우리가 서로 색맹인 척할 필요는 없어. 근데 그 색만으로 너를 판단하기로 한 건 걔네들의 결정이고, 문제야. 네 색의 문제가 아니라고."

"맞아 색맹인 척하는 거 너무 웃기다고 생각해 난."

엠마가 맞장구쳤다. 그리고 덧붙인다.

"준희 지난 파티 때 봤던 헨리 기억나? 걔가 너 어느 나라 사람인지 혼자 추리하려고 하다가 너 스시 좋아한다고 해서 '그럴 줄 알았어!' 이랬잖아."

"하하, 맞아. 그 일본오타쿠! 그냥 무시하고 대답도 안 했어."

"맞아. 근데 난 그게 데이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걔는 그냥 아시안 친구가 없는 거지. 아예 친구가 없을 수도."

오렌이 덧붙인다.

"헨리? 걘 진짜 고통스러울 정도로 백인적이지."

내가 덧붙인다.

"맞아. 오렌보다 조금 더 고통스럽워."

(일동 웃음)

"맞다 그거 봤어?"

우리는 당사자성으로 무장한 채 인종차별 농담으로 서로를 조금 놀리면서 이 소똥 같은 상황이 금세 아무 일도 아니게 만들고, 어제 본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새로운 시즌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엠마, 오렌과 한참 어떤 에피소드가 가장 재미있었는지 열띤 토론을 하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단전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무언가 결심한 듯이 일어섰다.

"얘들아. 나 라면 먹어야겠어."

"너 진짜 한국적이야. 하하하"

"너네도 먹을래? 밤에 먹는 라면이 최고야."

"아냐, 우리 요 앞에서 팔라펠 먹고 왔어. 맛있게 먹어"

엠마와 오렌은 블랙미러 새 시즌 첫 에피소드를 다시 봐야겠다고 거실 티브이를 켰다. 나는 거실이 보이는 다이닝 룸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당연한 것들, 그것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당연한 연애 방식의 정의, 게르만족이 한민족보다 더 유교적일 가능성, 젠틀하게 개새끼일 확률. 내가 파란색으로 읽어버린 1번의 색깔, 에메랄드색 때문에 읽지 못한 2번의 진짜 색. 그리고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색. 그러다 좀 전에 길에서 눈물을 훔쳤던 것이 정말 전형적 한국적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같다고 생각하며, 한국스러운 게 뭔지 모르는 2번에게 한국드라마를 좀 추천해 줄까 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곧 사레들려 고통스러운 기침이 이어졌다. 거실에서 엠마가 다이닝룸을 향해 소리쳤다.

"준희, 괜찮아?

"응 켁켁......난 그냥 한국스럽게 밥 먹는 중이니까. 영국스럽게 걱정 안 해도 돼."

"한국스럽게 꺼져."

나는 웃음이 터져 먹던 라면을 그릇에 뱉는다. 라면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오렌은 비꼬는 말투로.

"으웩, 내가 네가 한국인이라서 잘 안된 건 아닐 거라고 했지?"

우리는 일동 폭소를 터트렸다. 오렌은 의기양양하게 엠마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는 오렌보다 더 큰 농담을 던지고 싶었지만, 이때 두 명의 영국 친구들에게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를 잘 설명해 보려고 애쓰지 않은 것은 오래도록 자랑스러운 일로 남았다.




-끝-


*부티콜: 섹스만이 목적인 밤늦은 연락

*Slipknot: 미국 아이오와에서 시작된 헤비메탈 밴드

이전 03화Yellow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