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1번 vs 남자 2번
남자 1번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우리 집에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몸이 아주 다부지고 웃긴 사람이었다. 자신을 축구를 좋아하는 운동 기구 세일즈맨이라고 소개했다. 내 타투를 보더니 자신의 엉덩이에도 귀여운 타투가 있다고 했다. 슈퍼테드*의 주인공과 이름과 같아 자신의 엉덩이에 새겼다고 했다. 아무나 보여주지는 않는데 너는 특별히 보여 주겠다고. '어쭈 이것 봐라'라고 생각하면서 두 살 어린 1번의 적극적인 구애가 조금 귀엽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1번은 매일 끊임없이 연락을 했다. 뭐하는지, 뭐 할 건지, 뭐 먹었는지, 뭐 좋아하는지 또는 자신의 외로운 타투가 불쌍하지 않은지, 1번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처음부터 앞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남자 2번은 매우 느리게 겅중겅중 달려오는 듯했다. 아마 걸어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1번이 이번 주에만 벌써 4번째 술 한잔 하자고, 집 앞으로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이대로라면 2번과는 술 한번 못 마셔보고 1번 엉덩이의 슈퍼테드까지 만나게 될 게 뻔했다. 이 젠틀한 엉덩이 히어로를 만나기 전에 2번을 봐야 하는데 하던 어느 평일 저녁, 퇴근시간이 지난 8시. 2번에게서 와츠앱 메시지가 왔다. 주말에 바비칸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바비칸은 런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다. 천천히 겅중겅중 내달리던 2번은 높이 뛰기 선수였던 것인가? 나는 중력을 거스르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2번 아래에 열심히 앞만 보고 내달리는 단거리 선수 1번을 떠올렸다. 엉덩이 히어로를 영영 못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 했다.
남자 2번은 구글의 자회사 IT팀에서 일하는, 나보다 4살이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다. 이름에 스웨덴식으로 C 대신에 K를 쓴다고 했다. 뿔테 안경을 쓴 하얀 얼굴의 그는, 머리가 노랗고 눈이 에메랄드 색인 것을 제외하면 판교나 구로 디지털 단지에서 보는 개발자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 언어로만 대화를 많이 해본 듯 수줍게 말을 이어나갔고, 햇빛을 많이 못 본 듯, 피부가 어디 하나 그을린 데가 없었다. 체크남방을 입고 면바지에 커다란 백팩에 맨 2번이 자기처럼 얇은 자전거를 타고 바비칸으로 왔다. 평범한 베이지색 면바지와 오래된 컨버스 운동화가 그의 긴 다리와 함께 너무 멋져 보였다.
우리는 바비칸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가지고 나와서 광장에 있는 인공 호수옆의 계단식 타일 바닥에 앉았다. 날씨가 조금 쌀쌀했는데 덕분에 2번이 에메랄드 색 눈으로 나를 옆에서 내려다보면서 추위에 떨리는 내 어깨를 큰 손으로 슥슥 비벼주는 게 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온몸이 간질간질해져 왔다. 내가 머릿속에서 2번의 주름진 체크남방을 벗기는 사이에 그가 자신의 가족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남쪽 도시 보라스에 사는 친절하고 사이좋은 부모님, 몇 년 전 결혼한 누나와 귀여운 조카들. 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준희 너는 곧 결혼할 생각이 있어?"
"응? 결혼? 음... 난 지금 사귀는 사람도 없는데?"
2번이 머뭇거렸다. 자기는 결혼할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고. 가벼운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고. 결혼해서 빨리 아이 ‘들’ 도 낳고 싶다고
나는 그날 웃은 것 중에 가장 크게 웃었다. 게르만족도 한민족이었던가.
"우하하하 너 정말 한국사람처럼 말한다."
"응? 한국 사람? 한국 사람 누구?"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게. 누가 이렇게 말했을까.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을 들여도 특정하진 못했다. 2번이 말을 이었다.
"그럼 넌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니?"
"만약에 내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겠지만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이들도 정말 좋아하지만 그건 결혼할 사람과 상의해야 되는 문제 같은데?"
"넌 정말 한국 사람 같지 않아."
"응? 한국 사람? 아는 한국 사람이 있어?"
2번도 말을 잇지 못했다. 지 딴에도 나처럼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머릿속에 구름처럼 만들어졌겠지.
나는 그때서야 가장 한국사람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
"한국사람 같은 게 뭔데?"
"한국사람은… 어쨌든 아시안이잖아?"
쑥스러워하면서도 잘도 소똥 같은 소리를 하는 2번에게 뭔가 익숙한 것이 느껴졌다. ‘두 유 노 유교? 두 유 노 성리학?’이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공격할 의도만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의 낡은 컨버스 운동화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운동화의 주인인 게르만족의 금발이 빛바랜 색으로 아득히 멀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같은 프로그램 에러 팝업이 끊임없이 뜨는 듯한 답답한 대화를 고통스럽게 이어갔다. 빈 커피컵의 바닥을 뚫어지게 보다가 이 에러 메시지를 해제시키는 방법은 종료 버튼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 거의 동시에 바지를 훌훌 털면서 어색하게 일어나 터덜터덜 바비칸을 나와 역 방향으로 걸었다. 사실 여기서 걸어가면 된다고 말하며 나는, 만난 지 두 번만에 결혼한다고 해야 사귈 것이며, 당연히 아이'들'도 낳아야 된다고 하는 게르만족 유교보이에게서 급히 도망쳤고, 2번은 한국사람다운 게 사실은 뭔지 잘 모른 채, 한국사람 같지 않은 나에게서 굿바이 키스*도 하지 않은 채로 자전거를 타고 멀어졌다. 상체를 최대한 숙이고 내달리는 뒷모습이 마치 사이클 선수 같았다.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남자 1번에게 올인하기로 했다. 2번에게는 사실 계획을 말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저 아름다운 게르만족 유교보이 2번에게 실망한 것이 오히려 1번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정말이지 엉덩이의 슈퍼테드를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고 나도 귀엽다면 또 얼마나 귀여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날 저녁도 어김없이 1번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희 집 근천데 나오지 않겠냐고? 부엉이와 여우라는 펍이 있다고. 나는 당장 답장을 했다.
[금방 갈게! 곧 봐]
[뭐 마실래?]
[IPA?]
[좋은 선택이야]
집에서 3분 거리의 부엉이와 여우에 가는 동안 정말 좋은 선택일까 생각하면서 이상하게 빨리 움직이는 내 다리를 조금 진정시키고 펍에 도착했을 때 창가 구석자리에 출입문이 잘 보이는 곳에 테드와 맥주, 그리고 나를 위한 차가운 IPA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정시킬 새도 없이 내 두 다리는 그쪽을 향해 거의 뛰어가고 있었다. 맥주 두 잔씩을 마셨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1번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펍의 구석 자리에서 한 키스는 아주 길게 이어졌다. 맥주 홉의 씁쓸한 맛 뒤에 달콤한 보드라운 침의 맛이 났다.
"우리 집에 슈퍼테드 보러 갈래?"
-다음 편에 계속
*슈퍼테드: 1982년부터 TV에 방영된 영국 아동 만화
*굿바이 키스: 데이트 후 인사치레로 뺨에 하는 키스. 굿바이 키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건 데이트가 아니다' 라는 암묵적인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