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하우스와 절대 사면 안 되는 보르도 산 와인 연도
Mimizan, France 2017
미미종은 친구 레아 아버지, 장의 고향이자, 장과 캐롤라인의 세컨드하우스가 있는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이 세컨드 하우스에서 그들은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혹은 여름의 긴 2달 휴가를 통째로 보낸다고 했다. 남부 프랑스는 모두의 꿈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나의 꿈은 '남부프랑스'야." 바로 대학생 시절의 나, 자신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의 꿈은 '남서부프랑스'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의 집에서도 간단하고 신선한 식재료만 조금씩 사서 작은 주방을 단정하고 부지런하게 쓰던('장과 캐롤라인의 집' 참조) 캐롤라인은 이 집에서도 아담한 주방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하게 그 작은 주방을 지나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현관문이 주방을 통해 나 있는 집이었다. 사과나무, 무화과나무가 있는 앞마당(garden)을 지나 계단을 몇 개 오르면 여유로운 야외 데크(deck1)가 있다. 현관을 열면 바로 주방이다. 아담하지만 여러 창으로 유리창이 나 있어 밝고 따뜻한 주방을 지나면 거실의 폭신한 소파에 파리에서 함께 온 털뭉치 두 마리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거실의 뒷문으로 나가면 방과 거실을 잇는 중정(deck2)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욕실, 방 1,2,3으로 들어가는 다른 방향이 문이 있다. 그중에서 마틸드 커플이 묵었던 방(bedroom2)과 내가 묵었던 방(bedroom3)은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형식으로 이 두 방만 따로 가족 게스트룸으로도 사용가능한 좋은 여름용, 세컨드 하우스 계획 같았다.
반면에 조금 불편한 구조도 보인다. 방에서 주방이나 거실로 가려면 외부(deck2)를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주로 쓰이는 '써머하우스'라서 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여름에 앞마당 뒷마당을 오가며 다른 방향의 바람을 느끼고 비를 맞아본 사람이라면 공간마다 달라지는 와인의 향과 맛을 탐구하는 시간들을 감사해할 것이고, 이 집을 떠나 파리로 돌아가서 그것들이 아주 간절해질 것이다. 그래서 장과 캐롤라인이 주말에 시간을 내서, 여름을 통째로 비우고 이곳으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집의 모든 마당에서 달라지는 와인을 맛을 알아채기 위해서. 이렇게 같은 목재로 데크를 마감하고 비슷한 조경이 있는 두 공간이, 앞과 뒤의 마당으로 나눠지며 이렇게 공적 마당(deck1)과 사적 마당(deck2)으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됐다.
처음 이 집에 도착한 오후, 장과 캐롤라인, 레아의 여동생 마틸드, 마틸드의 연인 루이가 앞마당이 보이는 데크(deck1)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반가워 모두에게 비쥬(뺨에 하는 프랑스식 인사)를 한 명씩 순서대로 하고 장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진지하게 얘기한다.
"춥다물, 어제 출발했다더니, 런던에서 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수영해서 온 거야?"
"하하. 장 아저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기차가 연착이 돼서 파리에서 하루 자고 왔어요.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어, 고마워. 너 얼굴 보고 가려고 이틀이나 기다렸어. 자 와인 한잔할래?"
나는 어서 집구경도 하고 고양이도 만지고 싶은데 이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 여유로운 것이다.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오자마자 저 데크에 앉아 한 시간 넘게 와인을 천천히 마셨다. 엉덩이가 들썩들썩한 와중에 느긋한 척 와인을 마시다가 보르도 산 와인 얘기가 나왔다. 추천하는 보르도 와인이 있냐고 식당 웨이터에게 물어보듯이 바보 같은 나의 질문에 장이 현명하게 대답한다.
"와인은 네가 좋으면, 그게 좋은 와인이야. 그리고 2016년 산만 아니면 돼."
"왜요?"
"그때 보르도에 홍수가 났거든."
캐롤라인과 장은 두 번째 와인을 다 마시고 한참을 앞마당에 사과나무에 사과가 얼마나 열리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을이 되면 그 나무에서 못 생기고 크기가 제각각인 사과를 수확해 아담한 주방에서 사과파이를 굽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 먹으라고 쿠키를 구워놨다는 캐롤라인과 그 옆의 장은 내 얼굴을 오랜만에 봤으니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중에 입이 궁금해져서 주방 창가에 있던 볼록한 베이지색 리넨 천을 들춰보니 초콜릿 쿠키가 예쁜 접시에 10개 정도의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실망감과 연이은 큰 죄책감을 방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들인다. 이때 '많이는 못하고 조금만 했다'며 대형 소쿠리에 커다란 늙은 호박전이나 배추전이 10장씩 담겨 있었던 할머니와 엄마의 큰 손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엄마라면 응당 손이 커야 한다는, 피곤한 책임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에 대한 실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책임감을 먹고 어떤 냉장고와 주방은 점점 커지겠지.
뒷마당에서는 장과 캐롤라인이 떠난 후, 레아 커플과 마틸드 커플이 함께 담배를 피우며 와인을 마신다. 미미종 지역 축제준비를 하느라 어이없고 재미있었던 얘기를 하며 더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여자친구의 부모가 없으니 마티우와 루이가 조금 더 말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모두 다 조금씩 시끄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확실했던 건 와인이 맛도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장과 캐롤라인도 이 마당에서 아까보다 와인이 화사해졌다며 둘만의 시간을 더 보냈으리라.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장과 캐롤라인, 그들의 두 자녀가 이곳에서 보낸 여름을 생각해 본다. 두 달의 긴 휴가동안 그들은 파리를 벗어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해안가 시골마을에서 지낸다. 아침에 일어나 파리에서 함께 차를 타고 온 고양이 무슈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마당 앞에 야외 테이블에서 토스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을 것이다. 거실 소파에서 뒹굴던 레아와 마틸드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손을 잡고 뛰어가는 장면 뒤에는, 아이들을 따라오는 장과 캐롤라인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십여분을 걸어 비스케이만에 도착한다. 은빛 바닷물이 출렁출렁하는 해변의 얕은 뭍에서 수영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모래놀이를 시작하자 캐롤라인은 장을 두고 저 멀리 혼자 깊은 바다로 나아간다. 충분히 바다 헤엄을 치고 수영복위에 흐르는 물을 여전히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곁에서 햇볕에 바짝 말린다. 젖은 머리를 하고 집으로 나른하게 돌아오는 길에는 여름 오후의 낮은 해가 등을 뜨끈하게 만져 준다. 해변가에 있는 맛있는 빵집에 들러 쇼콜라테('뺑 오 쇼콜라'의 보르도 사투리) 두 개를 사서 장과 캐롤라인 하나, 레아와 마틸드가 하나 나눠 먹으면서 걸어온다. 그리고는 앞마당의 데크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의자 뒤로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로 데크 바닥에 물방울 무늬를 제각각 만든다. 장과 캐롤라인은 와인을, 레아와 마틸드는 사과주스를 마시며 오후를 나른하고 달콤하게 보낸다. 거실창가로 그들을 무심하게 보고 있던 고양이 무슈가 자, 목을 축였으니 이제 들어와서 나를 만져,라고 “냐아오” 소리를 내면, 마틸드가 응답하며 일어난다. "무슈." 그가 걸터앉아 있던 나무 의자 상판에는 작은 어린이 엉덩이 모양이 물자국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