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인간답게

‘휴먼’을 읽고

by 고라니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 알았다. 책은 주인공이 외계인인 설정으로 우리가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서술한다. 마치 도시의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그들의 외모와 환경, 문화, 인식, 의식주 전반에 관해 경험하고 이해하고 기술하듯 말이다. 이 ‘낯설게 보기’는 인류학에서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며 철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접근이다.


인문적 사고를 시작한다고 하거나 철학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낯설게 할 줄 안다는 말이에요. 낯설게 한 다음에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지요. 낯섬의 발생이나 집요함의 유지가 모두 주제의 활동력, 즉 덕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작동이라는 것이죠. 이 관찰의 집요함 속에서 새로 등장한 세계, 그것이 바로 자기의 세계이지요. 그것을 글로 써 놓으면 시가 되고,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명증한 범주의 틀로 구성하면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죠.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책은 끈질기게 우리 삶을 낯설게 관찰하다 의미로 전개를 좁혀간다. 서문에서 이미 그 방향성을 가리키고 있다.


만약 인간의 삶에 실제로 의미가 있다면? 만약에 지구에서의 삶이 단순히 두려워하고 조롱해야 할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겨야 하는 무엇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 부디 여러분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인간 삶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p. 12


조금은 통속적이라 여겨질 법한 사랑이라는 귀결에 갸웃해질 때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 알았다. 공황장애로 살아온 삶의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이 힘들고 끔찍해진 작가에게 지구는 외계인이 느끼는 것처럼 낯설어졌음을.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하나를 써 내려가며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 세상으로 나왔음을. 그렇게 이야기를 다시 보니 사무치고 애달프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 하는 노력이 한걸음마다 힘겨워 이 삶을 살아가는 나 또한 애쓴다 싶어 안쓰럽다. 그래서 우린 읽고 쓴다. 인간다운 나를 위해, 나를 나로 세우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작가의 말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2000년에 처음 떠올렸다. 그때 나는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이 책의 이름 없는 화자에게만큼이나 내게도 이상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강렬하고도 비합리적인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공황발 작 때문에 혼자서는 가게도 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평온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붕괴였고, R. D. 랭이 (나중에는 제리 맥과이어가) 한 유명한 말처럼, 붕괴는 종종 돌파구가 된다. 이상하게도, 지금 나는 그 개인적 지옥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아졌다. 읽기가 도움이 되었다. 쓰기도 도움이 되었다. 그게 내가 작가가 된 이유다. 나는 말과 이야기 속에서 일종의 지는 분야기 속에서 일종의 지도를 발견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지도 말이다.
나는 진심으로, 소설이 생명과 마음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책, 내가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이 이야기에 이르기까 지나는 여러 권의 책을 거쳐야 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기묘하고도 종종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아마도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전혀 없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아이디어가 나온 어둠의 심연을 농담이든 아니든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쓰기 시작하자 글쓰기는 기쁨이었다. 나는 2000년의 나 자신을 위해, 혹은 나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고 상상했다. 그런 이에게 지도를 건네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이야기가 내 속에서 너무도 오래 발효되어서인지 단어는 전부 준비된 듯했고, 이야기는 급류처럼 쏟아졌다.



기본적으로, 핵심적인 규칙은 지구에서 제정신으로 보이고 싶다면 알맞은 장소에서 알맞은 옷을 입고 알맞은 말을 해야 하며 알맞은 풀만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p.54



소는 지구에 사는 동물로, 가축으로 길들여진 다목적 유제류다. 인간은 소를 음식, 액체로 된 간식, 비료, 명품 구두 등을 전부 살 수 있는 일종의 가게처럼 대한다. 인간은 농장에서 소를 기른 다음, 소의 목을 베고 조각조각 잘라 포장해 냉장하고 팔고 요리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소라는 이름을 쇠고기로 바꿀 권리를 얻는 듯하다. 쇠고기라는 단어는 소라는 단어와 약간 다르게 들린다. 인간이 소를 먹을 때 절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진짜 소라는 사실이다. p.61



이 행성에서 정치란, 본질적으로 전부 전쟁과 돈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뉴스에서는 전쟁과 돈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차라리 '전쟁과 돈의 쇼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했을 것이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옳았다. 지구는 폭력과 탐욕으로 가득한 행성이었다. p.79



인간으로 산다는 건 뻔한 말을 하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시간이 끝날 때까지. p.115



음악을 듣는다는 건, 숫자를 세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숫자를 세는 것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라는 걸나 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p.144



인간의 놀라운 점이 그것이었다. 다른 종족의 앞길을 정해주는 능력, 그들의 근본적 본성을 바꿔놓는 능력, 어쩌면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몰랐다. p148



너도 알다시피 인간은 아직도 정신과 육체를 서로 뚜 렷이 구분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어.'같은 몸 안에' 있는데도 말이야. 그 둘이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듯 정신병원과 몸을 위한 병원을 따로 두고 있지. 정신이 자기 몸에 미치는 영향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다른 누군가의 정신이 아무리 인 간 아닌 존재의 정신이라 해도 -다른 누군가의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는 못할 거야. p.155



가족은 이런 식으로 함께 사는구나. 아내들은 때때로 소설을 써서 옷장 밑바닥에 숨겨두는 방식으로 온갖 비참함을 참아내며 남편 곁을 지켰다. 엄마들은 다루기 힘들고 부모를 미칠 지경까지 몰아가는 자식들을 묵묵히 견뎠다. p.192



그녀에게 '부모 가 된다는 것은 바닷가에 서서 어딘가에 육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육지가 있는지 알지는 못하는 채로, 부서지기 쉬 운 배에 탄 채 점점 더 깊은 물로 나아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임을 이해하게 된다. p196



천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천국에서 무엇을 할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함을 갈망하게 되지 않을까? 사랑과 욕망과 오해를, 심지어 만물에 활기를 불어넣는 약간의 폭력을 원하게 되지 않을까? 빛에는 그림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아닌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건 고통 없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고통 없이 존재하는 것. 어쩌면 그게 삶에 필요한 유일한 목표인지 모른다. 한때는 확실히 그랬었다. p.243



사랑은 단일한 순간에 영원히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며, 실제로 자신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방법이었고, 그럼으로써 그 시선이 지금껏 가져온 어떤 자기 인식이나 자기기만보다 훨씬 더 의미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p.289



사랑의 의미는 살아남도록 돕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는 또한 의미를 잊는 것이다. 찾는 걸 멈추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 아끼는 사람의 손을 잡고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신화다. 과거는 죽어버린 현재에 불과하고, 미래는 어쨌거나 영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미래에 도달할 때쯤에는 그 또한 현재로 바뀔 테니까. 존재하는 건 현재뿐이다. 언제나 움직이는,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 현재는 변덕스러웠다. 놓아줌으로써만 잡을 수 있었다. p.306



모든 삶에는 위기의 순간이, 내가 믿어온 것이 틀렸다고 말해주는 순간이 존재한다. 이런 일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유일한 차이는, 그 깨달음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놓느냐는 것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그 정보를 묻어두고 모른 척한다. 그렇게 늙어간다. 인간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등을 굽어지게 하고, 입과 야망을 움츠리게 하는 것도 결국은 그 부정(검)의 무게다. 이는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가 됐든, 용감하거나 광기 어린 대단한 행동을 하려면 변화해야만 한다. p.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