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67, 이탈리아 폼페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중부의 아말피 해안. 화창한 햇살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달려 조금 북쪽으로 가면 그다지 크지 않은 산을 만날 수 있다. 이름은 베수비오. 약 2천 년 전 이 산에서 분출된 화산재가 바로 아래 있던 도시를 덮쳤다. 도시는 그대로 멸망해버렸는데, 화산재에 순식간에 덮여버린 탓에 지금껏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도시의 이름은 폼페이다.
로마의 유적이야 곳곳에 넘치지만 폼페이가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보존상태 때문. 왕궁이나 교회야 기념물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니 보존되는 게 당연하지만, 서민들의 생활 터전은 계속 쓰이기 때문에 오히려 옛 모습이 남질 않는다. 우리도 아파트를 부수고 새로 지으며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곳은 몇 남지 않은 중세 로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관광지'로 꼽힌다.
폼페이에는 서민들이 살아가던 집과 내부 장식, 음식점의 화덕, 술집의 바, 목욕탕의 욕조, 골목의 주소 표기와 심지어 성매매 업소의 광고 그림까지 남아 있다. 이제는 흩어져 잊힌 이들의 삶을 그 바닥부터 상상할 수 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웅크리거나, 어딘가 먼 곳에 손을 뻗은 모습으로 그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생생히 기억된다.
기억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주된 소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아킬레우스는 죽을 것을 알고도 전쟁에 나섬으로써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누군가는 그저 기억되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SNS에 사진을 올리고,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그런 의지의 일부일 수도 있겠다. 지금, 여기의 주변인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서. 사실 나도 그렇다.
내로라하던 왕들도 남기지 못한 이름을 폼페이의 어떤 시민들은 영원히 남겼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영원 따위 바라지도 않았겠지.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 숨 쉬는 몇 초의 순간이 이름만 남아 기억되는 영원보다 더 값지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폼페이의 광장에는 투구를 잃은 기마상이 홀로 서 있다. 그 앞에서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이 순간을 박제하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제는 잊혀도 좋을 이 무너진 도시에서. 왠지 스스로 기억되고 서로 기억하려 바둥대는 우리를 이름만 남은 폼페이의 시민들이 쓸쓸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