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8, 스페인 바르셀로나
며칠 몸이 안 좋아 여행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했다. 계절이 추워진다. 감기 기운이 있는 듯해 조금이라도 따뜻한 남부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비싼 물가 탓에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여행이 끝나갈수록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인다. 기름값을 아낄 수는 없고 입장료를 아끼겠다고 여행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숙박비와 식비를 줄여 겨우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따뜻하고 물가가 저렴한 스페인에 도착하니 숨통이 트였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물론 FC바르셀로나도 유명하지만 나는 축구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원래는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가, 크리스마스의 북적임이 왠지 싫어져서 당일 아침에 취소해버렸다. 요즘은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는 상태가 편하고 좋다.
138년째 여전히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까사 밀라와 까사 바트요, 까사 구엘 같은 천재의 역작들. (까사는 스페인어로 "주택"을 의미한다.) 사실 별생각 없이 보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모양들을 뒤섞어둔 느낌. 눈을 감고 옷장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고 입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범재가 천재를 평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냐만은, 내게 가우디의 첫인상은 그런 식이었다.
여러 해석과 글들을 찾아 읽은 후에야 조금은 동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수천 년간 이어온 똑바른 열주라는 상식을 부수고, 가우디는 기울어진 기둥을 지었다. 둥근 아치 아래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압력. 견뎌내기 위해선 기둥도 기울어져야만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첨탑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오는 천장. 기울어진 기둥들은 나무처럼 저마다의 방향으로 뻗은 채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세계와 우리를 떠올린다. 150년 전의 한 건축가가, 똑바르지 못한 세계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라면 기울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기울어져도 괜찮다고 따뜻한 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까사 밀라의 옥상에 올라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도시가 살아온 긴 시간을 반영하듯 각종 양식과 색색깔의 건물들이 보인다. 중간중간 천재 건축가들의 독창적인 건물들도 눈에 띈다. 이건 부조화다. 서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있어야 바르셀로나다. 기워지고 덧대어져야 비로소 우리가 사랑하는 생명력 넘치고 열정적인 도시가 된다.
해가 지고 밤이 됐다. 닫힌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에 앉아 음유시인들의 버스킹을 들었다. 모두 돌려놓으라는 노랫말에 울컥해서 조금 울었다. 이 여행의 출발점, 도망치고 싶었던 옛일들을 떠올리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연인과 가족과 함께하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아 보였다.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혼자 온 걸까.
삶은 누더기 같아. 가끔은 구미에 맞는 몇 가지만 빼고 다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 무게에 짓눌려 잔뜩 기울어진 삶을 똑바르게 세우고 싶을 때가 있어.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그건 판타지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가녀린 환상 대신 이 도시는 굽은 등에 손을 얹고 말을 건넨다. 기워지고 기울어진 삶이라도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고. 크리스마스의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