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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noey Jan 20. 2024

나는 오늘도 열심히 휴식한다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 '진짜 휴식'하기


일이 즐거워도 번아웃은 온다

사회인이 된 후 가장 바빴을 때를 꼽으라면 재작년, 소규모 스타트업에 다닐 때였다. 직무 확장을 하며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코 뜰새 없이 일에 파묻혀 살았다. 거의 모든 일들이 새로웠고, 또 잘하고 싶었다. 얼마 안 있어 막차 시간을 외우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남아 불을 끄고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재미있었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스타트업의 마력인가 싶은데, 같이 불태우는 사람들과 함께 일에 몰입하는 자체가 즐거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일이 즐거워도 번아웃은 온다. 퇴근하면 어느새 11시 반, 잠옷으로 갈아입고 씻고 나오면 잘 시간이었다. 그대로 잠들기 아쉬워 침대에 누워 웹툰과 인스타그램 세상에 빠져든다. 12시까지만 해야지, 1시까지만 해야지 하다가 1시 반쯤 나 자신을 자책하며 간신히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주말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려는 듯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잔다. 14시간이나 자버린 날도 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또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주말이 다 가버린다. 이렇게 반복하길 몇 달째, 나는 우울해졌다. 휴가나 주말을 보내고 와도 쉰 것 같지가 않았다. 회사에서도 여유가 없어 평소의 역량을 내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을 때쯤, 유튜브에 ‘번아웃’을 검색해보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이 피곤하지도, 일에서 성취감이 없지도 않은데 왜 번아웃이 왔지?



비워내고 채워주기

일에 대한 재미가 아무리 커도 어느새 쌓여 버린 몸과 마음의 피로를 없애 주지는 못했다. 즐거운 일이더라도 자극이 계속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한다.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는 단순히 잠을 많이 자고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여가시간 동안 최대한 나의 피로한 뇌를 달래줄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내가 찾은 대답은 몸과 마음에서 해로운 것은 비워내고 건강한 것으로 채워주는 것이었다.


몸 - 비워내기

먼저 몸의 피로를 비워내야 한다. 잠을 푹 자고, 끼니를 제때 잘 챙겨 먹는다. 사람마다 숏 슬리퍼short sleeper, 롱 슬리퍼long sleeper인지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원하면 언제까지고 잘 수 있는 롱 슬리퍼였다. 평일에도 7시간 이상은 자야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숙면을 위해 밤에는 어두운 무드등만 켜두고, 느리고 잔잔한 음악만 듣기 시작했다.


몸 - 채워넣기

앞으로의 생활을 버티게 해줄 체력과 근육을 채워 준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에너지가 생긴다고 한다. 밖에 나가서 햇빛을 보면 더욱 좋다. 나는 매일 10분 홈트를 하고, 주말에는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다. 좀더 시간이 생긴 지금은 주 2회 헬스를 가고 있다.


마음 - 비워내기

일에 대한 생각, 걱정과 불안을 비운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일 생각에는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때 ‘멍’이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어폰을 꽂고 한강에 반짝이는 윤슬을 멍하니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푸른색, 붉은색, 주황색으로 물든 강물과 그 위로 부서지는 빛조각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자그맣게 들려오는 강물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 그 순간에는 과거나 미래는 없고, 지금 나를 둘러싼 풍경과 내 안에 반짝이며 일렁이는 감정만이 있다. 멍은 삶에 여백을 만든다. 숨 쉴 틈을 만들어 바쁜 일상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마음 - 채워넣기

나를 위한 정신적 에너지를 채워 넣었다. 하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전시를 보는 등 자기계발이나 취미활동을 하며 성취감과 재미와 감동을 채웠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건 한참 보고 나서도 자책감 외에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킬링 타임, 도파민의 노예가 되어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알아내기

무엇으로 나의 여가를 채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점차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몇 시간을 잤을 때 가장 컨디션이 좋을까? 어떤 운동을 좋아할까? 어디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무엇을 할 때 만족할까? 유난히 편안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새기며 나에게 맞는 휴식을 찾아 나갔다.

특히 나의 취향과 선호에 대해 좀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노란 오후 햇살을 맞으며 자전거 타는 것도, 노을 지는 한강도 좋아하는구나. 작고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하는구나. 시끄러운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그래서 이제 나는 날씨 좋은 봄, 가을의 주말에는 따릉이를 타고 공원으로 향한다. 오늘은 노을이 예쁘겠다 싶은 날에는 근처의 한강공원으로 노을 헌팅을 나간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조용하고 포근한 공간을 찾아내어, 가벼운 이북 리더기나 노트북을 챙겨서 머물러 본다. 전시나 청음 공간을 찾아가 두근거리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고 음악에 넋을 놓기도 한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상을 지나다 나도 모르게 '아 좋다'라고 내뱉은 순간들을 기억해둔다. 그런 순간이 우연히 다시 찾아오길 기다리는 대신, 시간을 내어 먼저 그런 순간으로 간다.
봄의 나무 아래를 걷는 순간을 좋아한다면, 그저 스스로 시간을 내어 좀 더 자주 걸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나의 일상으로 가져다 놓는 일을 좀더 부지런히 해야 한다.



어느 봄날의 따릉이와 황홀하던 윤슬과 겨울날의 서가



바쁘다 바빠 현대 휴식

번아웃이 온다는 건 그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기에 ‘쉴 시간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대로 쉬어주지 않으면 결국 나도 모르게 동료와 가족에게 퉁명스러워지고, 집중력과 업무 효율은 떨어졌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휴식했다. 위에서 소개한 휴식의 4요소를 최대한 고루 넣어서, 빽빽한 시간표 위에도 군데군데 끼워 넣을 수 있는 틈새 휴식들을 여럿 시도해 보았다.


우선 평일에는 매일 밤 1시간짜리 휴식 루틴을 만들어 나에게 배급했다. 일종의 리추얼ritual이다. 씻고 스킨케어를 한 후 방의 조도를 낮추고 잔잔한 음악을 틀며 시작한다.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꺼내두고, 따뜻한 물을 떠오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침대 위에서 15분 정도 책을 읽고 몇 줄짜리 감사일기를 쓴다. 루티너리라는 앱을 사용하면 1시간에 딱 맞춰서 할 수 있다. 피곤한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이 루틴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막상 시작하면 생각보다 만족감이 컸다. 작은 행동들이지만 나를 꼼꼼히 돌보며 하루 종일 받았던 자극을 씻어내고 평온과 감사로 채우고 나면, 그날은 그냥 그런 하루에서 제법 만족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유독 지칠 때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들어가 5분 정도 명상을 하기도 하고, 회사가 한강과 가까워 날씨가 좋은 날엔 점심시간에 혼자 나가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스몰톡조차 버거운 날에는 혼자 점심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주말에는 무조건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카페에서 회고나 공부를 하고, 노란 햇살에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나와서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달렸다. 그리고 하늘이 붉어지면 노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한강의 물 색과 반짝이는 윤슬을 관찰하는 것이 날씨 좋은 주말의 코스였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가거나 책 읽기 좋은 공간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멀리 가기 귀찮은 날에는 집 앞 카페라도 들러 무언가 뿌듯할 만한 일을 했다.



유튜브만으로는 부족했던 이유

하루종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웹툰만 봤던 주말은 유독 울적하다. 하루가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에 오히려 쉽게 잠들지 못하고 허전함을 채우려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주말만을 기다렸는데, 고작 이걸 하기 위해서 기다린 걸까? 반면 책을 읽고 햇빛을 쬐고 자전거를 탔던 주말은 평온한 기분으로 밤을 마무리한다. 주말이 가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는 만족감이 든다.

나는 이 두 가지 패턴의 휴식을 가짜 휴식과 진짜 휴식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큰 차이는 행동의 주체에 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켤 때는 대부분 나의 의지와 선택보다는 도파민에 중독된 뇌가 멋대로 내리는 명령에 따른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다가 문득 시간을 깨달으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아마 유튜브를 보더라도, “오늘은 1시간 정도 000를 봐야지.” 하고 딱 1시간 동안 즐겁게 보고 끌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휴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행복에 대한 뇌과학적 이론들을 살펴보면 항상 자율성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휴식 역시 마찬가지인듯 하다.

또 하나 발견한 차이는 여백이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길 때 우리는 하나하나를 곱씹고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를 보기 바쁘게 손가락이 움직여 다음 사진을 보여준다. 인스타그램 안에는 여백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전시를 볼 때는 다르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작품과 작품 사이에 생각의 바다를 유영할 여백이 있다. 한강을 바라보거나 자전거를 탈 때, 운동에 몰입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음미하고 빠짐없이 느낀다. 그러면 그 순간 자체가 여백이 된다. 보통 여백이 넉넉한 휴식은 진짜 휴식이 되었다.



사이사이 행복이 내려앉은 삶

매일 일과 돈, 경쟁과 비교 속에서 치이는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 겹겹이 쌓인 피로는 행복과 낭만을 느끼는 감각을 무디게 한다. 행복은 복권 같은 큰 사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라 한다(’행복의 기원’ 중). 초콜릿 같은 작은 행복도 선명히 느끼려면, 먼저 쌓인 피로를 걷어내야 한다. 나에게 맞는 휴식을 찾아 일과 삶 속에 적절히 끼워 넣어야 한다. 건빵 사이 별사탕처럼. 그것이 우리를 더 오래, 행복하게, 멀리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휴식한다. 더 즐겁게 일하고, 나를 잃지 않는,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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