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이직이 나에게 알려 준 것
5년 동안 일하던 에이전시에서 직무 확장을 하며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이직 사유는 연봉을 올리기 위해서였으나,
연봉 상승과 예상했던 야근 러쉬 외에 추가로 얻게 된 것들이 있었다.
나 스스로의 성장과, 일에서 얻는 즐거움과 행복을 알게 된 것, 나에게 맞는 직무를 찾게 된 것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따뜻한 고인 물이었던 첫 직장에서의 5년
나는 처음 취업했던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거의 5년 동안 쭉 UI디자이너로 일했다. 이따금 이 일이 정말 나에게 맞는 일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곧 다른 일보다야 이게 낫겠지, 하고 털어내곤 했다. IT업계에서 5년은 꽤 긴 시간이다. 대기업이 아닌 이상 3년 이내로 이직을 하면서 몸값을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 곳에서 5년을 일하게 한 것은 그곳의 그럭저럭 일할 만한 복지와 자유로운 분위기, 에이전시답지 않게 야근이 없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적당히 따뜻했던 그 고인물에 젖어 나는 안주했다.
퇴사할 생각을 한 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고민하면서부터이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로는 포트폴리오를 쌓기에 한계가 있었다. 사실 일 욕심보다는 연봉 걱정이 먼저였다. 예전에는 에이전시에서 경험을 쌓아 대기업에 가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인하우스 경험을 더 본다고도 한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1년쯤, 포트폴리오 만드는 것만 반 년쯤 하다가 더이상 미룰 수 없어 나를 채찍질하기 위해 퇴사를 질렀다.
퇴사를 했으니 직장을 구해야 했다. 공고를 알아보며 사이드 프로젝트도 하고, 업계를 알아보려고 디자이너 오픈채팅방에도 들어가고, 디자인 컨퍼런스도 들었다.
준비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었다. 이제 디자이너는 예쁘게만 만드는 디자인이 아니라 UX 역량과 문제해결능력 등 다양한 역량을 요구받고 있었다. JD에 쓰여 있는 것들은 내가 해본 적 없는 경험이 태반이었다. 디자이너 오픈채팅방에 올라오는 실무 이야기나 디자인 컨퍼런스에서 이야기하는 것들 모두 나에겐 낯선 이야기였다.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나는 따뜻한 우물 안에서 머무르는 사람이었구나. 모르고 살아온 시간이 아까웠고, 한편으론 나도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회사에 지원하고 탈락하고 또 지원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퇴사한 지 반 년쯤 후, 결국 작은 스타트업에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다.
*최근 모바일이나 웹 화면을 디자인하는 역할을 부르는 말이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 UXUI 디자이너 > UX디자이너 / UI디자이너
왼쪽으로 갈수록 담당하는 직무 범위가 넓어진다. 단순하게 보자면 왼쪽은 제너럴리스트, 오른쪽은 스페셜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즐겁게 야근하는 사람
처음에만 해도 스타트업에 대한 온갖 배드엔딩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나는 빠르게 적응했다. 세 달이 지나자 여기서 1년쯤 일한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들었고, C레벨 팀원에게 '자기가 본 중 가장 빨리 성장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 이렇게 말하긴 민망하지만, 나 스스로도 날개를 단 것 같았다.
스타트업에 들어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일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즐겁게 야근하는 사람.. 이상한 말이지만, 그게 나였다. 문제를 분석하고 풀어나가는 것, 고객에 대해 고민하고 데이터를 통해 알아 나가는 것, A/B테스트, 유저 테스트를 해보고 고객 인터뷰를 해보는 것, PO와 개발자와 협업하는 것.. 새롭게 알아가는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UI 디자인을 비주얼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물론 여전히 나의 역할이었지만, 문제를 분석하고 UX 기획하는 일을 할 때 유독 신이 나고 의욕이 넘쳤다. 나에게 맞는 일을 알게 된 것이다.
일이 재미있으니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게 되었다. 매일 업무 회고를 하면서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들을 시도해 보고, 출퇴근 시간엔 뉴스레터와 아티클을 읽고, 점심 시간이나 주말엔 일 관련 책을 읽었다. 부끄럽지만 UX나 고객 개발, 프로덕트에 대한 좋은 책들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스스로도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니 즐거웠고, 더 자발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
일이 즐겁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안다. 첫 직장에서 아직 신입이었을 때, 야근하고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선임 디자이너님이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처음 몇 년은 일이 너무 즐겁고 회사가는 게 재밌고 야근도 싫지 않았어요.
근데 이젠 야근은 쫌 힘드네요ㅎㅎ”
이 말을 들은 신입 시절의 나는 너무 신기했고.. 그 분이 나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회사 가는 게 재밌지? 와, 저런 사람이 성공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5년 후에 그 말에 공감하게 될 줄이야. 그 분이 나와 다른 존재라 그랬던 게 아니라, 잘 맞는 직장과 일을 찾았는지에 달렸던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이직한 지 1년도 안 되어 뽕이 덜 빠진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던 삶은 사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퇴사한 것이 나에겐 터닝포인트였다. 나오고 나서야 내 앞에 펼쳐진 길들이 보였다. 나는 내가 안정적이고 편안한 직장에서 큰 욕심 없이 일하고 적당히 월급 받는 삶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저 포도는 분명히 실 거야."라고 말하는 여우처럼, "나는 바쁘고 치열하게 일하는 그런 거 안 맞아."라고 말했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던 일과 삶의 방식은 사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 앞에는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선택한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일, 다른 삶이 어떨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직장도, 이 직무도 베스트 답안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열어 두어야 나의 길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한 5년 동안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2년만 빨리 퇴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자주 한다. 커리어를 고민하는 많은 주니어 디자이너들에게도, 지금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해보길 권하고 싶다. 방법은 사이드 프로젝트나 스터디가 될 수도 있고, 이직이 될 수도 있겠다. 업계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디자인 컨퍼런스나 세미나를 보는 것도 좋고(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열려서 더 접하기 쉬워졌다), 디자이너 오픈채팅방도 도움이 되었다. 이런 직간접적인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내고, 나에게 귀기울여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비교적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지만, 사실 힌트는 충분히 있었다. 첫 취업 전에는 UX 서적을 사서 읽으며 UX에 관심을 가졌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때에도 UX 디자이너가 따로 있었지만 UX에 대한 회의를 엄청나게 했고 그걸 좋아했다. 그때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할 줄 몰라서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지금 일하는 당신도 자신이 주는 힌트를 무시하지 않고, 일하는 행복을 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