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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눈 쌓인 골목길
가로등이 문 닫은 빵집을 비추고 유리 너머 불 켜진 가게의 제빵사이자 주인장인 누군가는 계산기와 차 한잔에 하루를 마무리한다.
심야를 가르는 기계소리
을지로 외진 곳 어딘 가에는 휴일을 잊은 채 종이와 씨름했던 인쇄소 주인의 두꺼운 장갑과 그 출력물들이 가로등 흔적에 비친다.
영화 개봉을 앞둔 전야
늦은 시간 책상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바깥 풍경에 멈춰 선 채 창 밖에 지난 시간들을 비춘다.
얻은 것과 잃은 것.
떠난 이와 남은 이.
격랑의 한 해가 끝나가는 순간.
갈 곳 없는 마음들도 쉬어 가는 지금,
나는 초라하게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 평온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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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의 일생>이 개봉했다.
어제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했다고 써야 하는데 엊그제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했다.
브런치 원고가 하루 늦어져 버린 죄책감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넌 거짓말쟁이)
좋아요 20개를 보내주는 이들과 약속을 가볍게 어겼고 그 가벼움은 나를 가벼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만 같다.
그래도 18개는 눌러주세요.
(10%로만 깎아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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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썩 좋지 않다.
연말 극장가는 그동안의 비수기를 보상받기 위해 더 큰 대작으로 올인을 해버렸고 그 사이 대작이 아닌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밀려가는,
냉정하게는 망해가는 이 업계가 그 기회가 왔을 때 움츠린 어깨를 펼치려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나의 어정쩡한 연말 마음.
인간관계도, 일도. 강한 사람에게 늘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갑자기 강해지는 섭리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리라.
이 삶의 섭리가 이 연말 동시에 오는 것이 아프다.
나를 두근거림으로 잠 못 들게 한다.
(심장아 정신 차려!)
하나 반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짜인 각본 안에 있던 내용이라는 것.
대작이 아닌 다음, 연말 극장가에서 많은 상영관을 보장받지 못할 가능성은 늘 있던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을 영화와 진정성의 힘으로 막으려 했지만 다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며.
또 물론 막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심야, 조조 가리지 않고, 밤샘근무를 하고, 멀리서, 휴일에도 이 작은 영화를 통해 생의 감동을 얻겠다며 뛰쳐나온 관객들이 이미 1만 명.
10만 명이면 좋았겠지만,
20만 명이면 더욱 황홀했겠지만 숫자에 기댄 성취감은 누군가의 순수한 마음을 이끌기엔 가식적이다.
이 영화로 손해를 본다는 것,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손실이 확정적이라는 나의 각본은 훌륭했고 그 안에서 세상의 많은 부분은 흘러가는 대로 작동했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이들도 그렇게 돌아서는 것이 뼈아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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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밤 24시에 누가 이 영화를 보고 가겠다고?
크리스마스 아침 7시에 누가 이 영화를 보러 나오겠다고?
야속한 시간표는 남 탓 하지 말고 이 시간에 내몰린 소비자(관객)를 보라 말해준다.
집중해! 정신 줄 놓지 마, 마음속으로도 울지 마.
그래, 다른 거 다 미루고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크리스마스에 영화가 개봉했는데 중요한 개인 일이 뭐가 있을까?
간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데이, 사람들이 모였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전한다.
이들이 나의 아픈 뼈에 손을 덧대 준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마음들.
나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그들의 일생에 주마등처럼 지나갈 '나'라는 사람이 오래오래 비치길 바라본다.
그들도 나에게 그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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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은 해야 회사에 무언가 말할 수 있는 작품의 지금 스코어는 1만.
실패냐고? 손실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시간의 기회비용으로는 아니다.
1명이 죽자고 덤벼든 인생영화가 대한민국 1만 명의 눈빛을 새벽, 심야 가리지 않고 2시간 동안 빌려왔다.
믿을 수 없는 생의 순간들이라는 수식어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겠다.
당장 99% 정확도로 정산을 해보면 나간, 나갈 비용 500,000,000원.
(5억 보다 커 보이는 8개의 0의 힘)
빠듯했던 예산은 막는다고 막았지만 탁송비용, 회계비용을 더하면 1-20%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극장 매출에서 거둬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은 1억 원.
(0이 없으니 더 초라)
근데 이것도 잘했을 때고 이거보다 나빠질 수도 있고,
물론 지금처럼 관객들의 힘으로 더 이어 나가면 1.5억으로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수를 하자. 매스는 필요 없다.
약간의 정신승리는 하자, 이 세계 산수까지는 아니어도 가난이 드러나면 안 되니까.
간단하다. 3억 5천만 원의 현금이 사라진다.
회사에 그 현금흐름이 없다면 누군가 막아야 한다.
누가 막는가? 우리 회사 등기에 올라있는 내가 막는다.
(풀썩, 일어나, 다 앱에 있는 숫자일 뿐이야. 풀썩)
내가 세어 본 돈이 아니어서 실제 얼마큼 뼈아파야 할지 감이 없다.
노력이 부족해서 생겨난 일. 책임은 온전히 책임질 사람이 가지면 될 뿐인데
책임질 사람이 있다면 우리 회사는 아직 좋은 회사가 아닌가?
(빠져든다. 이 세계로...)
근데 이 뼈가 아픈 건 물리적으로 아픈 것.
마음이 다친 것과는 비할 바 없이 가벼운 것이다.
모자라면 채울 것이고 채울 것이 없다면 나의 시간과 노력으로 갚으면 될 일.
부채도 자산이다. 이 명언이 나를 지켜줄 날은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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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관객들과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도 나눴다.
“여러분 직장인으로서 일을 하다가 보면 가끔, 아주 가끔 내가 하는 일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이 영화가 그랬습니다. 아무도 안 산 게 이상했던 이 영화, 제가 사 와서 관객들께 선물로 주고, 관객분들이 이 영화 보고 ‘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라고 말해주는 순간을 꿈꾸게 되었지 뭐예요.”
“그런데 이 영화를 개봉하고 이틀 만에 수많은 사람들이 CGV앱에, 롯데시네마앱에, X에, 인스타그램에 ‘제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노라.” 말해주고 있어요.”
“여러분 저 멋지지 않나요?” 이 말은 뺐다.
그런데 정말 꽤 멋지다. 나 말고.
이런 말을 실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한다는 것이.
“눈물이 났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고 또 나서 화장실 가서 울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제가 제일 많이 생각났어요.”
- 아 정말 이 글 보고 오열했다.
“이 영화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 쓴 분 동네 가서 하루 종일 서성이다 커피 한잔 손에 쥐어 드리고 싶다.
“이번 연말 나를 위해 가장 잘한 선물은 이 영화를 본 것입니다.”
- 이렇게 말 예쁘게 하는 사람은 정말 만나서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다. 말 나쁘게 하는 거친 사람들도 이런 말 들으면 순화가 될 것만 같다.
(나도 순화되는 것만 같다, 또 찔리는 사람 손 들어요.)
“뇌종양 판정을 받고 살다가 한 달 전 오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해 보던 시기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영화 보러 갔다가 울어버렸네요.”
- 아프지 마세요, 몸도 마음도 이제 다 괜찮고 지금부터 삶의 진짜 의미가 다가서기를. 진심입니다.
거친 숨을 고르고 가라앉은 피곤한 눈매를 따뜻한 손길로 누르고 생각한다.
높은 확률로 일어날 손실이 막지 못한 나의 바람과 그 순간들을.
사람의 말이 마음을 비추고, 비친 마음들이 나를 감싼다.
드러날 거짓이 아닌 진심의 언어만이 가질 수 있는 힘.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들이 당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 위로를 건네고 싶은 나는.
이제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격랑의 파고를 잠재우고 싶다.
높은 확률로 일어난 손실은 높은 확률로 지켜낸 시간 속에서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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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관객과의 만남에 함께해 준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님께 물었다.
일주일 동안 중등 과학책을 공부한 어른답게 당당히.
박사님, 박사님.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나요?
(질문의 수준에 전원 당황)
(곧 이어질 답변의 수준에 전원 내적 기립)
“아니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아니라 지구가 돼요.”
“묻히거나 매장, 태워지거나 화장, 물로 가거나 수장, 그렇게 지구가 되는 것이지요.”
“지구 안의 일부가 되거든요. 그렇게 지구의 일부가 되고요.”
그럼 지구는 언제까지 존재하나요?
“태양이 죽으면 지구는 죽습니다. 태양의 일생이 끝나면 지구도 죽습니다.”
“그렇게 별이 죽을 때는 몇몇 별들은 펑 터지면서 별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근데 펑 터지면서 자신의 것을 우주에 흩뿌리고 사라지는데, 어떤 현상들로 그 뿌려진 물질들이 다시 쌓이고 모여서 별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별이 될 수 있습니다.”
순간 조용해지는 관객석과 나.
난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사람이 죽으면 지구가 되는데, 지구도 별이잖아.
태양의 소멸로 그 별이 다시 별이 된다면,
죽어서 지구가 된 사람. 결국 사람은 별이 된다는 이 말이 사실이었다니.
영화나 드라마 속 엄마, 아빠가 죽은 아이들에게 말하던 작가들의 대사
“아빠는 별이 된 거야. 슬퍼하지 마.”
이 대사가 그냥 예쁜 말이 아니라 과학적 예쁜 말이었다니.
뭉클한 마음은 객석의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진솔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70분의 찰나가 척이 멈추지 않고 춤을 추었던 7분처럼 우리의 기억 속을 채웠다.
박사님과 나 그리고 연말의 시간을 소중하게 쓴 200명의 우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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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꿔온 시간을 지켜내는 성취감은 불안한 미래를 잠시 잊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내 일생에 와닿았다.
“당신은 나에게 전부로 와닿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이 말을 해주자.
그리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도 말해주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되는 거래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박사님 말이에요.”
2025년을 살아 낸 아름다운 모든 개개인의 별들이 따뜻한 오늘을 보내길.
나와 너 그리고 모두.
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