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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Sep 23. 2024

사랑에 관한 고찰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로 살펴보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 대상은 단연코 어머니일 것이다. 그런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수십 년간 제재받고 억압받았다면, 그것은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언젠가 발현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는 성적인 매력에 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랑을 나누는 연애를 통해서다. 현대사회에서 연애는 단순히 가볍고 기분 좋은 감정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쉽게 다루어졌다가는 개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것이 연애라는 행위이다. 그만큼 서로의 실존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다지만, 서로에게 깊숙한 상처를 남기는 연애의 본질은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을 통해 그 공간을 채워나가려는 이기심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연애 활동을 시작한다. 겉으로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일지라도, 속은 유아기에 머물러있어 본인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모르고, 더 심각한 것은 실상은 원하지 않음에도 스스로를 속여 파멸에 이르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이하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원제 『Art of Loving』)에서 사랑을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혼자 있는 능력’이 성숙한 사랑을 위한 조건이며, 이를 위해 실존적 자아를 먼저 찾고 이를 사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이하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속 주인공인 에리카는 실존적 자아가 무엇인지 모른 채 미숙한 사랑을 하며 고통 속에 허덕이는 인물이다. 주인공인 에리카를 중심으로 미성숙한 사랑이 한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해 본 후, 성숙한 사랑을 위한 실존적 자아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에리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는 모두 사랑에 대하여 결핍을 가진 존재다. 우선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부재에서 기인한 외로움을 딸인 에리카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성인인 에리카가 중년의 여성으로 향해 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철저히 감시하고 보호해야 하는 미성년자로 취급하며 그녀의 모든 일상을 통제하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에리카를 젊은 시절 자신이 포기했던 옛 꿈인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에리카를 끊임없이 세뇌시킨다. 그녀의 어머니는 에리카에게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프롬이 말한 전형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양상이다. 프롬은 나르시시즘의 기원을 유아의 경험에서 찾는데, 나르시시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에리카 또한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자기애가 기이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는 서로가 서로의 나르시시즘의 반영으로서 존재한다.


   에리카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분리된 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훈련을 하도록 강요받고 그녀의 소비생활 및 연애생활 모두를 간섭받으며 정신적 통제는 물론, 어머니와 한 침대에서 자고,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성적 욕구를 욕실에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뒤틀린 방식으로 방출하는 등 육체적 통제까지 겪는다. 그녀의 육체는 스스로에게 낯선 미지다. 그녀는 한 번도 스스로의 정신과 몸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준 적이 없고 그 방법도 모른다. 프롬은 사랑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그 대표적 형태가 모성애라고 설명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고, 아이는 어머니에게 사랑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통해 아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알아간다. 에리카는 어머니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에리카의 자의식은 성장에 실패한 어린아이의 것과 동일하다. 그녀는 일상적인 욕구, 편안함 등 삶의 즐거움은 철저히 차단당한 채로 사회적 성공으로 대변되는 직업인 피아니스트로서 위대한 반열에 오르기 위한 일상만을 반복한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불쑥하고 올라올 때는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정사를 관음 하며 조금씩 악취를 풍기며 욕구를 발현시킨다. 또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성숙한 방식으로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에리카는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아름답고 순수한 것으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녀의 뒤틀린 욕구는 연애의 상대방인 클레머와의 관계에서 절정으로 분출된다.




클레머를 향한 에리카의 사랑

   

   에리카가 내보이는 클레머를 향한 사랑은 이중적이다. 텍스트에서는 에리카가 클레머에게 마조히스트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는 편지를 읽도록 강요하면서도 그가 편지의 내용을 알고 나서 그 내용을 무시해 버리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는 모습이 나타난다. 학대와 억압을 요구하면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바라는 것이다. 에리카는 클레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건강하게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느껴본 감각이라고는 고통뿐이다. 에리카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 적 성향으로 인해 고통받고 학대당함으로써만 쾌락을 느낄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성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에리카는 클레머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온갖 기이한 행각을 벌이며 클레머의 남성성을 박탈시키는 한편, 클레머로부터 다정하고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을 바라기도 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에리카의 나르시시즘 성향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롬은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의 미숙한 사랑이 능동적 형태로 나타난다면 가학성 음란증(Sadism)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며,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에리카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클레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양상에서 그녀의 미숙한 사랑이 나타난다. 사실은 클레머를 통해 구원을 기다리지만, 그에게 종속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것처럼, 클레머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내보이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할까 봐 지레짐작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클레머에게 선을 긋고 강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기 방어 기제를 활용한다. 에리카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사랑은 자아가 형성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오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모른다는 점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에리카는 자신이 스스로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클레머와 관계를 맺으며 이제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욕망들이 가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에 선행하는 실존적 자아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순간부터 고독감을 느끼는 존재다. 자연인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리되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 속에서 고독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실존적 고독을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독한 인간들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인 성숙한 사랑이 필요하다. 프롬이 말한 성숙한 사랑의 핵심은 ‘주는 것’이다. 물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즉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주는 행위만으로 행복한 사랑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 안에 사랑이 넘쳐흘러서 이를 나누어 주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알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은 근원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의 단점마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실존적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 경험을 수행해 봄으로써 현재의 삶의 자세를 각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에리카가 클레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게 된 경험처럼 말이다.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 모두 미성숙한 사랑으로 인해 생긴 자신의 결핍을 상대방이 해소해 주기를 바랐다. 그 방식은 각각 상대방을 괴롭게 하고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따뜻하고 건강한 교감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사랑도 배워야 한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내가 상대의 일부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로 달성될 수 있다. 즉, 프롬이 말했던 사랑의 기술은 미숙한 사랑을 하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에리카가 자기 자신을 칼로 찌르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듯 -이 대목이 그녀가 가진 결핍을 온전히 극복했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미성숙한 사랑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계기를 통해 새로 태어나기 위한 각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사랑의 이름으로 가려진 채 자신의 결핍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를 폐쇄적이고 억압된 요구를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의심하고 경계하며,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도 실존적 자아는 노력을 통해 형성할 수 있는 것이므로. 에리카가 진정으로 원했던 ‘구원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발돋움을 그녀는 내디뎠으니, 필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끝내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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