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Jul 08. 2024

비 오는 날에는 들깨쑥수제비

먹구름이 찬비를 사정없이 쏟아내는 날에는 본능적으로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몸에 들어오는 찬 기운을 뜨거운 음식을 통해 내보내려는 방어기전 아닐까.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먹고 싶은 음식이 두둥실 떠올랐다.

바로 냄비를 꺼내어 1.5 리터 물을 받고 멸치다시마 국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물이 끓을 동안 반죽을 준비한다.

엄마가 예전에 준 감자가루(십 년 다 돼가는) 세 스푼, 밀가루 적당량, 죽염 한 꼬집, 올리브오일 한 찻숟가락, 지난봄 데쳐서 얼려둔 해쑥을 잘게 썰어 넣은 반죽을 치댔다. 둥글게 빚어서 숙성되게끔 덮어둔다.

몹시 세찬 파도가 고향 바닷가에 선물인 척 던져준 돌미역 한 오라기 물에 불리고 야채를 썰었다.


주황색 당근은 동그랗게, 감자는 큼직하게, 버섯은 기다랗게 찢고, 대파는 어슷썰기 하였다. 

여기서 잠깐 십 년 된 감자가루를 소개하기로 한다.

강산이 변하는 십 년씩이나 된 식품의 유통기한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된다. 이십 년도 무방할 것이다.

이 감자가루의 지난한 생성과정 스토리는 이러하다.


장마가 오기 전에 캔 하지 감자를 크기별 분류 가장 하급 꼬마전구 같은 알감자를 씻어서 엄마는 커다란 고무통에 차곡차곡 담고서 비닐 밀봉하였다. 푹푹 찌는 더위에 거품을 뽀글뽀글 문 감자는 썩기 시작한다. 수돗가에서 천덕꾸러기 신세 장맛비가 그치고 작열하는 태양이 고무통을 데우면 감자는 속까지 푹푹 썩는다.


담장 옆 붉은 칸나꽃이 피고 지는 동안 뜸 들이듯 들뜬 비닐 덮개를 여는 날 썩고 썩은 감자 냄새가 온 마당에 진동한다. 썩은 감자를 뭉개서 일일이 짜는 엄마 손에는 고약한 냄새가 배서 한동안 지은 따끈한 밥에서도 감자 냄새가 났다. 껍질을 벗은 감자 전분은 다라이 그득 뽀얀 유즙 빛깔로 떠다녔다.

그 지독한 냄새를 우리는데 열흘 이상 소요된다.


아침저녁으로 우려낸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부어준다. 그렇게 냄새는 서서히 빠진다. 

갑자기 소낙비가 오면 그 무거운 다라이를 들였다가 내었다가 여간 정성이 기우는 게 아니다. 

냄새가 다 빠지면 촘촘한 무명 자루에 넣어서 주물럭주물럭 물을 빼고 전분만 거른다.

회백색이 도는 축축한 전분가루를 엄마는 통풍이 잘 되게 리어카 위에 대발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천을 펼쳐서 말렸다. "맴맴맴-" 추녀 귀퉁이 들썩이며 매미가 맹렬하게 우는 여름 내내 썩고 우려내고 물기를 말려서 백설같이 새하얀 감자가루가 맹글맹글 만들어진다.


마당 한 켠 차지한 리어카에 감자가루 마르는 풍경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빠질 수 없는 풍경이었다. 마르면 마를수록 새햐얘지는 그 마법 가루를 그림자놀이에 지친 나는 손가락 끝으로 비벼보았다. 새하얀 눈길을 밟듯이 뽀드득 소리가 나면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촉감이 좋아서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엄마도 그 촉감으로 감자가루가 완성되는 날을 기다렸으리라. 마침내 대발이 거둬지고 감자가루를 익반죽 한 엄마는 예쁜 분홍색 햇 완두콩을 넣어서 감자떡을 만들어주셨다. 아궁이에 불 때서 쫄깃쫄깃 속이 투명한 감자떡을 찌는 저녁에는 잔치국수가 곁들여졌다. 이 특별한 음식을 먹는 여름 저녁은 아무리 성질 사나운 모기떼가 출몰하여도 은하수를 건너는 별들이 휘황찬란하였다.


엄마 뼛골이 문드러진 감자가루 한 봉지 남은 세월 아껴, 아껴 먹어야겠다.

그새 국물이 펄펄 끓는다.

감자 당근을 먼저 투척 미역을 넣고 숙성된 반죽을 널따랗게 잡아당겨 최대한 얇게 한 조각씩 떼 내어 냄비에 사뿐사뿐 넣어준다. 센 불로 끓이면서 썰어둔 대파 버섯을 넣고 들깻가루 몇 큰술 떠 넣어 휘휘 저어준다. 

장맛비에 불어난 실개천 징검다리처럼 수제비가 몽글몽글 떠오르면 소금 간 불을 끄고 옹기 사발에 담는다.

곁들임 찬은 묵은지, 뜨끈하고 칼칼한 환상조합 한 상이 차려졌다.


한 숟가락 떠 넣었더니 고소한 들깨 국물에 돌미역 바다 내음이 확- 끼얹어졌다.

그다음 쑥향이 은은하게 올라온다.

연초록 쑥 섬유질이 성글게 박힌 수제비 식감은 쫄깃쫄깃.

큼지막한 감자 겉은 파삭 무르고 속은 살캉 씹혔다.

희뿌연 안개를 헤쳐 나온 해맞이 당근은 달캉달캉, 감칠맛 도는 버섯은 차지다. 

깊은 맛을 내는 묵은지는 아삭아삭 씹히고 후루룩 삼키는 국물맛!


동시다발 모공이 열리면서 땀방울이 맺힌다.

옹기그릇 밑바닥 마지막 건져 올린 수제비도 퍼지지 않고 탱글탱글하다. 

감자 전분과 쑥의 결집력이 한 내공하였다.

바깥 날씨도 빗물, 내 피부도 끈적끈적.

실내외 온통 물기를 머금었다.

그런데 개운하다.


거친 산마루 빗길에 뛰어 내려온 듯 후련하다.

축 처지는 장마철 몸과 마음을 가뿐히 되살려주는 들깨쑥수제비, 비 오는 날 소울푸드로 손색없다.

지난달 삼청동에 갔을 때 항아리수제비 가게 앞에 긴 줄이 늘어선 걸 보았다.

내가 음식 가게를 낸다면 들깨쑥수제비 해물부추전 도토리묵 단품 메뉴로 대박 날 것만 같다. 

장마철 내가 만든 수제비를 먹으려고 처마 아래 비를 피한 제비들이 꽁지 깃털 퍼덕이며 까맣게 긴 줄을 설 것만 같다.     






평범한 음식도 어떤 재료를 넣어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특별한 음식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찰이 필요한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