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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l 15. 2024

에버그린(Evergreen)

_변하지 않는 가치

옅은 해무를 드리운 7월의 바다, 그 바다를 보면 가슴이 뛴다.

마주 앉아 시원한 자몽에이드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눠도 겉돌며 쌓이는 언어의 불통을 속시원히 저 푸른 수평선에 헹궈낸다. 차 유리창을 내려서 바다 내음을 맡는다. 잔잔하지만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습한 대양의 체취가 훅 끼얹는다. 해변에 밀려온 소라껍질 마르는 냄새, 파도가 실어 나른 소금이 희게 빛나는 갯바위 냄새, 수심 깊은 해저에서 꾸물거리며 살아가는 해양 생명체들이 품은 냄새, 수평선과 소나기구름이 밀당하며 희롱하는 냄새, 저 수평선 너머 먼먼 이국으로 유랑하는 마도로스의 시가 냄새, 모래섬에 내려앉은 한 무리 괭이갈매기들이 날개 깃털 고르는 냄새.



푸른 동해를 끼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내게 구원의 길,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의 총량이 가르쳐 준 핵심가치와 맞닿은 길,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동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도시에서 꾸려온 생활이 물거품이 되면서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오직 이 길에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길, 그 길 끝에는 초록색 풍경 소리 매단 대숲을 배경으로 노모(老母)가 기다리는 붉은 벽돌집이 있다. 이제는 고향 산천이 돼버린 아버지 무덤도 동그랗게 자연과 어우러져 나를 기다린다. 


칠십 년 해로한 부부의 사별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홀로 남은 엄마를 보면서 서서히 깨닫는다. 밥맛이 없다며 점심을 거르는 엄마는 홀쭉한 몸이 깃털처럼 더 가벼워졌다. 잘 안 움직이려 하고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듯하다. 늘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살아계신 것처럼 든든하다는 엄마. 그 가녀린 몸으로 마을 입구 육백 년 된 당나무 그늘에 가서 허무한 세월을 달랜다. 친구도 없이 외로운 엄마는 당나무가 유일한 친구이다. 오가는 차량을 보면서 심심함을 달래고 대처로 나간 자식들은 언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나무는 조선시대부터 살아오면서 상투를 튼 마을 노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그들이 떠나고 새로이 태어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시대가 뒤바뀌는 세월의 증거로 버티고 서있다. 나무는 알까. 엄마의 아픔을,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기다림을, 남아있는 엄마의 시간을.


나보다 더 굽이굽이 엄마의 주름진 세월에 가려진 상처를, 애환을, 강물 져 흐르는 눈물을 알 것이다. 엄마와 나무는 그렇게 말없이 깊이깊이 서로의 등에 기대어 속마음이 여울져 흐를 것이다. 엄마의 걸음으로 느릿느릿 당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망부석이 되려 하는 엄마의 쓸쓸한 노년을 바라보았다. 구원의 길을 한 달에 한 번 달음박질 찾아가면 엄마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짝 잃은 외기러기는 자꾸만 지난 시간이 빛바랜 사진첩을 들추었다. 목놓아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은하수 저 너머 심우주 어딘가에 투영되어 흐를 것이다. 



아주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가 모과나무 잎사귀에 뛰어올라 쉬고 있는 부엉이카페에서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금강송을 휘돌아 흐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강변에 자리 잡은 그 카페는 통유리창 너머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 공중에 한 획을 휙 그으며 비스듬히 서 있고 비바람 불면 운치 있는 대숲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부엉부엉" 정다운 부엉이 소리 밤낮 들리는 그곳, 얼굴을 까맣게 그을린 친구들이 순박한 눈동자의 부엉이 같았다. 스트레스 받더라도 대처로 나가 복닥거리는 삶을 선택하는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한적한 고향에서 그들만의 느린 방식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이 고향 언덕에 서 있는 느티나무같이 믿음직스럽다.


내가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고향은 대칭적인 관찰자 시점 번잡한 도시의 삶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도시를 버리고 고향에 파묻혀 살아가라고 하면 살아갈 거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정체된 시간이 띄운 밤하늘 별빛이 매일같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매너리즘에 빠진 별들은 생동적인 빛을 잃어버리고 말겠지. 이쪽에서 저쪽 끝을 바라보면 희미한 거리감으로 가물가물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실체를 원근감으로 가늠하며 바라보는 관찰자 시점 맹목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나의 맹목을 깨게 해주는 친구들의 '체험 삶의 현장'이 그들의 현장감 있는 대화로 짐작된다. 한 친구는 서울소재 명문대 출신, 그럼에도 그는 젊은 날에 낙향하였다. 도시에서 방황하는 시간을 접은 그는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인생을 관조하는 눈길이 수행자처럼 고요하고 탐욕을 일찌감치 거둔 눈빛이었다. 그 사람이 던지는 눈길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길이 보이고, 마음길이 훤히 보이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보인다. 흔들리는 눈길을 보면 그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을 본다. 


학창 시절에는 서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남사친들이 건너편 나뭇가지에 앉아서 노래하는 부엉이들처럼 편안하다. 이 카페는 해 질 녘 강줄기를 따라서 서쪽 하늘 물들이는 노을이 아주 아름답고 비 오는 날에는 흔들리는 대숲이 아주 운치 있다고 한다. 맑은 날도 이렇게 좋은데 더 멋진 순간 친구들과 함께 혼자서라도 찾아오고 싶다. 해 질 녘 드낮게 날면서 노을을 감상하고 관조적인 눈길로 세상을 통찰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옅은 해무가 산자락에 돌돌 감기는 저물녘 들길에 내려섰다. 벼꽃이 피기는 아직 이르고 진녹색 벼포기들이 행렬 맞춰 장마철 습기를 빨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들길 언덕에 무리 지어 핀 도라지 꽃들이 땅거미가 데려오는 오각형 보라색 별빛을 수집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 초이레 초승달이 빼꼼히 고개 내밀자 페이스파우더 케이스를 딸칵 연 노란 분꽃들이 분냄새 두드리며 화들짝 피어났다. 논물에 어른거리는 저 빛은 무엇인가. 짙은 먹물이 스며드는 벼포기 사이로 자그마한 초승달이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하늘에 뜬 달보다 더 생김새가 또렷한 초승달 조각배를 얻어 타고서 논물을 헤쳐 잠시 유유자적, 내가 걷는 이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이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vergreen


Love soft as an easy chair

Love fresh as the morning air 

.

.

Like a rose under the April snow

I was always certain love would grow 

Love ageless and evergreen seldom seen by two

.

.

.

.

Two lives that shine as one morning glory and midnight sun

Time we've learned to sail above

Time won't change the meaning of one love

Ageless and ever evergreen



_Luther Vandross 'Evergreen'






아버지가 화단에 심은 노란 분꽃, 해가 질 무렵 피어나서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
서쪽 하늘에 뜬 초이레 초승달
같은 시각 들길 논물에 빠진 초승달, 저 조각배를 얻어 타고서 두둥실 유유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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