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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Nov 15. 2024

욜로, 특별한 시공간

  어떤 목적으로 낯선 공간에 발을 들여놓을 때 그 공간이 주는 시각적 이질감은 잠시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고 잠자던 호기심을 유발한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일이 없고서야 절대 가게 되지 않는 곳. 그래서 가본 적 없는 장소였다. 아이들 어릴 적에 근처에 어린이박물관이 있어서 한 번은 스쳐갔던 곳이었다.


  반수를 선택한 아이의 수능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주변을 맴돌았다. 꽤 남아도는 자투리 시간, 학교 건너편 야트막한 산을 올라갔더니 낙엽이 툭툭 흩어져 날리는 나무들이 음영을 드리운 맨발 걷기 오솔길이 산속으로 굽어져 끝자락을 감추었다. 보는 순간 깊숙이 빨려드는 그곳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긴다. 맨흙길과 야자매트 길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고 데크를 놓아서 오르기 쉽도록 정비된 오르막길이 끝나고 숨을 고르는 쉼터에는 정자가 어김없이 놓여있었다. 황토볼 체험장에는 발뒤꿈치 각을 세운 낙엽들이 꽂혀있었다. 우리나라는 찾는 이 별로 없는 산속에도 돈을 바른 흔적이 티 나게 많은 선진국이다.


  언덕길을 내려와서 학교 교문 앞에 서성거렸다. 학부모 차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학교 앞 네 개 차선 중 한 개 차선은 정차한 차들로 주차장이 돼버렸다. 계속 교차로에서 밀려드는 차들을 경찰들이 동원되어 도로교통질서를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제2 외국어를 선택한 아이는 집에서 좀 떨어진 이 사립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처음 마주하는 학교인데 석조기둥이 웅장하게 떠받친 교문을 지나 노란 은행잎이 흐린 하늘 사이로 새 나오는 햇살을 움켜쥔 모습이 인상적인 오르막길이 쭉 이어지고 학교 건물은 저 언덕 너머 통 보이지 않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명문고등학교 같다.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인지되지 않았던 학교이다. 비평준화지역 인근 시에 워낙 명문고등학교들이 즐비하여 그쪽으로만 신경을 썼고 거기로 진학하였었다. 


  해를 거듭하며 이제 진짜 마지막 수능시험 학부모로서 인파에 합류한다. 엄마들 인상착의를 보니 그새 올드한 축에 속한 나는 무리를 빠져나와 아까 보았던 회갈색 통나무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자작나무 숲을 옆구리에 낀 그 카페 주위를 그냥 서성거릴 참이었다. 교문에서 불과 열 걸음 뗐을 뿐인데 황톳빛 토분이 겹겹이 쌓인 화원 입구가 나타났다. 그 입구에 커다란 토분에서 자라는 색색의 가을장미들이 한가로이 피어있었다. 


  향기로운 장미의 환대를 받으며 화원 입구로 이끌려 들어갔다. 제철에 피는 장미들보다 11월에 피는 장미들에게 더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푸른 하늘 아래보다는 흐린 하늘 아래 피는 장미들의 색깔이 저 먼데서 또각또각 화사한 숄을 두르며 다가오는 여인같이 더 선명하고 화사하다. 누구나 기지개를 켜고 눈동자를 생글거리는 봄보다는 태양의 고도가 멀어지면서 오슬오슬 한기가 돌고, 소슬바람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경계에 내몰리는 이 즈음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력이 내향성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갑다. 우리의 언어는 향기로 충분하다. 식성 취향 패션 여행 사고방식을 미주알고주알 주고받지 않더라도 직감적으로 소통한다. 너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서로의 빛나는 아침과 저녁을 살아내고 있었다.


  내게로 향하는 너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나의 사랑이 부족하여도 서로의 천칭저울에 흔들리는 눈금을 비교하지 않는다. 내면에서 피어나는 관심과 사랑은 자신의 잔에 담겨 출렁거리는 평정심조차 향기롭다. 구태여 말을 보태는 것은 향기를 사그라들게 만든다. 존재 그 자체로 미소 짓게 만들고 나를 행복하게 한다. 자질구레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런 공간으로의 갑작스런 침투는 이 장소에 온 목적을 잊고서 고요한 기쁨을 선사한다. 딸아이 수능시험 치는 데 와서 선물 같은 시간을 거닐고 있었다.


  늦가을 줄장미들이 줄줄이 핀 화원은 여느 도심의 화원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이 계절 압도적인 국화는 잘 보이지 않고 공중에 철제 다리를 놓아서 흩어진 건물들을 연결하는 공간의 배열 방식, 천장에서 내려오는 줄에 엮어 화분을 층층이 걸어놓은 식물들의 진열 방식 그리고 처음 보는 희귀한 꽃들이 시선을 제압한다. 장미 입구 오른쪽에는 행잉플랜트 작은 꽃가게가 있고 고가로 연결된 왼편 화원 입구에는 유칼립투스 올리브나무들이 이국적인 정원 분위기를 연출한다. 안쪽에는 이끼류 고사리 분홍색 애기동백 노란색 낮별 같은 난초과 꽃들이 빛을 입고서 반짝거리는 정원이 나타났다. 


  황금빛으로 나부끼는 억새들의 안내를 받으며 흰색 주황색 장미들이 놓인 천국의 계단을 따라서 야외에 노출된 지하공간으로 내려가면 두 번째 찾아온 화창한 봄이 제라늄 꽃들을 한가득 피워내고 아이비 스킨답서스 덩굴식물들이 끈에 매달려 공중에 초록색 물결이 일고 노란 레몬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나무가 창가에서 자라는 유리온실 화원이 있다. 유리온실 화원 1층과 2층이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는 플랜트카페 바깥으로 나오면 미세한 바람결 늘 속삭이는 가을빛 자작나무 숲이 이 카페를 더 돋보이게 한다. 화원과 카페가 지상과 지하를 넘나들며 여러 건물과 입체적으로 설계된 수수께끼 같은 곳. 우연히 마주친 "욜로(You Only Live Once)" 마법 같은 장소이다.


  차 한 잔의 여유를 무리수로 물린 수험생 학부모는 자작나무 사잇길로 그 공간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자작나무 숲에 첫눈이 내리기 전 욜로, 이 공간을 다시 마주한 채 2층 테라스에 앉아서 천천히 식어가는 차를 마시며 다시는 오지 않을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일들이 돋을새김 된 올 한 해 되새김질하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 어느덧 어둠이 깃든 교문 앞 학부모들은 갯벌에 선 갈대숲처럼 두런두런, 남극 얼음 벌판에 선 황제펭귄처럼 아이들이 내려올 언덕을 향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오늘 하루 무척 많이 걸었다. 다리가 아파서 까치발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추억이 될 이 마지막 저녁에 집중하였다. 


  그냥 다녀도 괜찮은 대학교를 접고 아이는 또다시 그 어려운 수능공부를 선택하였고 도전하였다. 훗날 시간이 지났어도 이 도전의 시간은 아이에게 잊히지 않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힘들지만 꿈이 있어 즐거운 도전 또한 욜로, 한 박자 쉬어가지만 더 나은 도약으로 이끄는 쉼표를 찍으며 저녁 6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교문 양쪽에서 야구장 조명 같은 둥근 램프가 여러 개 박힌 엄청 높은 최신식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어떤 엄마는 수고한 아이를 위해 꽃다발을 들고서 한참 어린 늦둥이 동생까지 데리고 땅거미를 단단하게 밟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른 엄마 펭귄 폰이 울렸다. 


  "이제 끝났어. 진짜 마지막 수능이야. 다시는 안 봐."

  "그래, 수고했다. 엄마도 수능 졸업이다."










욜로, 마법의 공간에 스며들면 흰구름 속에 잠긴 듯 나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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