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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중얼

오징어게임과 사피엔스

456명의 절망 속에서 발견한 호모 사피엔스의 어두운 DNA

by 꼬불이

오징어게임이 증명한 4만 년 전의 진실

'네안데르탈인은 왜 사라졌을까?'

4만 년 전 유럽 어딘가.

키 170센티미터의 건장한 남성이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이마는 툭 튀어나왔고, 코는 크고 넓다. 네안데르탈인이다.

저 멀리서 날씬한 체구의 무리가 다가온다.

이마는 평평하고, 턱은 뾰족하다. 호모 사피엔스다.

두 종족이 마주치는 순간, 역사가 바뀐다.

그리고 현재...456명의 현대인이 아이들 놀이로 포장된 죽음의 오징어게임에 참여한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4만 년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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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멸종? 계획적 제거?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을 본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이 잔혹한 풍경. 456억 원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성. 생존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모습.

그러다 깨달았다. 이것은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겪었던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충격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호모 사피엔스의 체계적인 제거 작전의 결과일 수도 있다고.

증거는 명확하다.

네안데르탈인은 30만 년간 유럽에서 번영했다. 뇌 용량은 사피엔스보다 컸고(1,500cc 대 1,350cc), 도구 제작 기술도 뛰어났으며, 심지어 동굴 벽화까지 그렸다. 그런 그들이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도착한 지 불과 1만 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빠르다.


이것은 《오징어게임》의 첫 번째 게임과 정확히 같은 논리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255명이 죽었을 때, 그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규칙을 만든 자들의 의도된 결과였다.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게임의 룰'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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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신화, 생존의 현실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을 '협력'이라고 했다. 낯선 이들과도 공통의 믿음(종교, 국가, 화폐)으로 뭉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자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오징어게임은 그 협력의 이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게임에서 255명이 죽는 순간, 참가자들은 깨달았다. 여기서는 협력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는 것을.

상우와 알리의 관계를 보자.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 알리는 한국인 상우를 형이라 부르며 신뢰했다. 마치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이 사피엔스를 동료로 여겼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구슬게임에서 상우는 알리를 속여 죽음으로 내몬다.

"미안하다, 알리야."

이 한 마디에 담긴 것이 바로 사피엔스의 진실이다. 우리는 협력하지만, 그것은 생존에 도움이 될 때뿐이다.

4만 년 전 사피엔스들도 네안데르탈인을 죽이며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네안데르탈인아. 하지만 우리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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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협력의 어두운 무기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결정적 차이는 지능이 아니었다. 바로 '대규모 협력' 능력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개별적으로 강했다. 근육질이었고, 추위에 강했으며, 사냥 실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소규모 가족 단위로만 행동했다.

반면 사피엔스는 수백 명이 협력할 수 있었다. 네안데르탈인 가족 하나를 사피엔스 부족 전체가 포위하는 상황. 결과는 뻔했다.


오징어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팀을 이룬다.

기훈-상우-알리-오일남. 지영-새벽. 덕수와 그의 수하들. 각자의 생존을 위한 소규모 연합체다.

줄다리기에서는 팀워크로 승리하지만, 구슬게임에서는 서로를 배신해야 한다.

협력은 더 큰 파괴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사피엔스의 협력 능력이 더 큰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네안데르탈인은 개별적 충돌은 있어도 종족 전체를 멸종시킬 정도의 조직적 학살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달랐다. 수백 명이 협력해서 체계적인 제거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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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무기, 종교라는 폭력

사피엔스의 결정적 무기는 복잡한 언어였다. 대규모 작전을 조율하고, 적에 대한 증오를 퍼뜨릴 수 있는 능력.

네안데르탈인도 언어를 사용했지만, '여기 매머드가 있다'는 정도였다. 반면 사피엔스는 '내일 새벽에 동쪽 언덕 너머 네안데르탈인 마을을 습격하자'라는 복잡한 계획을 전달할 수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종교였다. "우리의 신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것은 신의 뜻이다."

종교는 살인에 의미를 부여한다.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성전이 되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의 관리자들도 비슷한 논리를 사용한다. 게임을 '공정한 기회'라고 포장하고, 참가자들을 번호로 부르며 비인간화한다. 한 번 '타자화'가 시작되면, 살인은 더 이상 살인이 아니다. 해충 방제가 된다.


자원 경쟁의 제로섬 게임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했다. 사냥감, 거주지, 연료용 나무. 지구는 두 종족 모두를 부양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오징어게임도 마찬가지다. 456억 원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 게임.

모든 참가자가 게임을 포기하면 아무도 죽지 않지만, 돈도 사라진다.

첫 번째 투표에서 참가자들은 게임 중단을 선택한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간 후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온다.

왜일까?

문명사회에서도 결국 생존경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빚더미, 실업, 가난. 이것들은 현대판 사자와 늑대다.

네안데르탈인들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사피엔스와 공존하며 자원을 나눠 갖거나, 아니면 죽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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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의 증거, 학살의 흔적

DNA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다. 현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유전자에 1-4%의 네안데르탈인 DNA가 섞여 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사피엔스 남성들이 네안데르탈인 여성들을 '전리품'으로 취했다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정복의 결과로.

네안데르탈인 남성들은 죽이고, 여성들은 강제로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사피엔스로 키워졌다.


오징어게임에서 새벽의 선택을 보자. 깡패 덕수에게 강간당할 뻔한 그녀는 결국 그와 손을 잡는다. 생존을 위해 존엄을 포기하는 선택.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 여성들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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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라는 얇은 껍질

하라리는 말한다. 문명은 사피엔스가 만든 가장 성공적인 허구라고.

법과 도덕, 인권과 정의. 이 모든 것들이 협력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의 믿음이라고.

오징어게임은 그 허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보여준다.

456억이라는 돈 앞에서 도덕은 사라진다. 생존 위기 앞에서 법은 무의미해진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권은 휴지조각이 된다. 참가자들은 여전히 '사람'이지만,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문명의 보호막이 사라진 순간, 그들은 4만 년 전의 조상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날것의 생존 본능만이 남는다.


관찰자들의 시선

오징어게임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는 VIP들이다. 안전한 곳에서 게임을 관람하며 내기를 거는 부유한 관객들.

이들은 현대의 사피엔스를 상징한다.

4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직접 네안데르탈인과 싸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TV로 전쟁을 시청한다. 스마트폰으로 재난을 구경한다. 뉴스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

VIP들이 참가자들을 보는 시선은 우리가 아프리카 난민을 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동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무관심한 시선.

우리는 모두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생존게임을 구경하는 관찰자다.


승자독식의 진화적 논리

《사피엔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 모든 대형 포유류의 97%를 멸종시켰다. 공존이 아닌 독식을 선택한 것이다.

오징어게임의 룰도 명확하다. 오직 한 명만 살아남는다. 공동 우승은 없다. 나눠 가질 수도 없다.

이것이 우리 DNA에 새겨진 승자독식의 논리다.

마지막에 기훈과 상우가 대결하는 장면. 어린 시절 친구였던 두 사람이 칼을 겨누는 순간. 이것은 4만 년 전부터 반복된 사피엔스의 운명이다.

결국 상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친구를 죽일 수는 없지만, 자신이 죽어서 친구가 이기게 하는 선택.

이것이 사피엔스의 모순이다. 잔혹하지만 때로는 고귀하다. 이기적이지만 때로는 희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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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라는 새로운 종교

하라리는 돈을 사피엔스가 만든 가장 성공적인 허구라고 했다.

종교보다 강력하고, 제국보다 오래가는 공동의 믿음.

오징어게임은 그 돈의 마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456억 원 앞에서 모든 가치는 무너진다.

우정, 사랑, 가족, 도덕. 심지어 생명조차 교환 가능한 상품이 된다.

4만 년 전 사피엔스는 먹이를 위해 네안데르탈인과 싸웠다.

지금 우리는 돈을 위해 서로 싸운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다. 생존을 위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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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네안데르탈인들

4만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보리지니, 이누이트.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네안데르탈인'들이었다.

하지만 조직화된 '사피엔스'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종족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AI가 발전하면서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한다.

더 똑똑한 '종족'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4만 년 전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에게 했던 것을 AI에게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미래의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징어게임은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 정교한 방식으로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4만 년 전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생존이 최우선이다. 여전히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여전히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다.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장면. 기훈은 비행기에 오르지 않고 다시 게임의 진실을 파헤치러 간다. 왜일까?

아마도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게임은 끝났지만, 더 큰 게임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현실 자체가 오징어게임이라는 것을.


결론: 4만 년의 진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증거다.

우리는 선량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는 그저 생존하려고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같은 인간도 죽일 수 있고, 다른 종족은 말할 것도 없다.

오징어게임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문명이라는 가면을 벗으면, 우리는 여전히 4만 년 전의 그 사피엔스다.

네안데르탈인을 죽이고, 그들의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하며, 그들의 터전을 차지했던 그 존재들.

이것이 선악의 문제일까? 아니다. 이것은 진화의 문제다.

선량함과 악함은 문명이 만든 개념이다. 하지만 생존 본능은 DNA에 새겨진 프로그램이다. 4만 년의 진화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456억 원 앞에서 친구를 배신하는 것과 생존을 위해 다른 종족을 멸종시키는 것.

규모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우리는 지혜로운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생존하는 인간이다.

456억 원 앞에 선다면, 당신은 정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아는 것은 당신뿐이다. 하지만 4만 년 전 DNA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졌지만, 그들을 죽인 DNA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다. 그리고 그 DNA가 456명의 참가자들을 게임장으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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