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1)

애석하게도 편한 곳

by 화가 이목

60*42.5

검은 도화지에 모자이크

해당 작품은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깊은 수면에 잠긴 것처럼 잠식되어 있던 '나'는 수면 위로 보이는 빛을 따라 나아갑니다. 뜯고 나가면 밖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고 거센 파도가 칠 테지만 이곳은 안정이 아니기에 벗어나야 합니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작업 한 이유는 가볍고 조용히 서서히 쌓여 내가 잠식되어 있는지도 모르게 가라앉은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울과 불안은 볍고 말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찢어진 종이 하나가 붙었다 한들 금방 털어낼 수 있으니까요. 하나 둘 수가 늘어나 서서히 숨통을 조여 와도 래봤자 찢어진 종이 하나를 내가 못 털어낼 리 없지 하며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가라앉은 '나'는 고요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우울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며 벗어나기를 거부합니다. 더 이상 혼돈도 불안도 느끼지 않은 이 상황을 괜찮다 느낍니다.


2025APP 그룹전 현장 모습
제가 먼저 뜯자 관객분들도 뒤따라 뜯고 나아가셨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은 '무서워서 잘 못 뜯겠다'였습니다.

다른 안정과 혼돈에 비해 크기가 큰 데다 알루미늄 액자는 차갑고 무거운 느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작은 종이들이 손대지 말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기에 쉽사리 뜯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흰종이가 나올때까지 뜯으면 됩니다


이는 의도된 바가 맞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감정의 늪이니까요. 발버둥 쳐 나가려 애썼다 다시 가라앉는 순간 이전보다 더 깊이 빠져들게 니다. 그럴수록 잠식은 손대기 어려워지고 탈출은 생각도 못하게 된 채 '이 상태도 나쁘지 않은데, 조용하고 안전한 것 같아, 변하려 힘쓰지 않아도 되잖아' 며 안주하게 됩니다.

후련하고 서러운 감정이 교차하지만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안정이 아닙니다.


벗어난 직후,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거면서 그 오랜 기간 괴로워했어야 했나 하며 다시 혼돈과 잠식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정과 닮은 형태를 가지고,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곳은 안정이 될 수 없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무를 수 없는 곳일 뿐이죠.

아무도 이를 탓할 순 없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니니까요. 억지로 끄집어내었다간 눈이 멀지도 몰라요. 스스로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테죠. 하지만 그 무엇도 탓할 순 없습니다.


잠식의 이야기는 긴 편입니다. 안정이 깨지고 혼돈으로 가는 과정은 비교적 짧지만 잠식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더군요. 그 시간을 아까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언가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지금보다 어린 나를 탓하며 항상 그 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어린 날의 초상은 그렇게 사소한 슬픔들이 쌓여 잠식을 만들어냈고 저는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들을 수십 번 반복하고 원망하다 끝내 부숴 길로 만들고 나서야 '더 이상 모르는 길이 아니네. 이제 다시 돌아와도 아는 아픔이구나' 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고 잘게 부숴 빚어진 기억들은 백사장의 모래처럼, 길게 이어져 은하수처럼 반짝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초상은 다시 되돌아갈 저를 위한 위로가 된 셈이죠.

잠식이 너무 무거운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되도록 겪지 않아 이해하지 못하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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