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네이버에서 연재되었던 웹툰, ‘헬퍼’를 좋아했었다. 그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강가에 살았고 그 강에는 짜증이 흘렀다. 그들은 짜증의 강의 주민이었다.
오늘은 단골 와인바에 혼자 술을 마시러 가는 날이었다. 요즘 들어 특히 사람에 흥미가 식어 ‘집-회사-헬스장’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해를 거듭할수록 인적 인프라가 확장되었지만, 그 해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뜨고 지기를 반복했기에 주변에는 자연스레 얕은 관계들만 남았다. 나를 좋아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인연들은 서로 공을 들여야만 볼 수 있었다.
얄팍한 관계에 얄팍한 사람으로 나를 구겨 넣은 지 햇수로 8년이 되며 종종 ‘내 성격이 원래 이랬던가, 내가 어떻게 웃었더라’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성급히 화를 낼 수도, 맥없이 웃을 수도 없었고 안색은 비가 그친 웅덩이처럼 잔잔하게, 그렇게 지냈다 덕분에 비치기를 온건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아닐 수도..) 내가 어떻게 웃었더라.
그래도 술은 가끔 먹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으로 와인을 사 와 그럴듯하게 축축 처지는 노래를 틀어놓고 먹었다. 시선은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어느 한 곳에 얌전히 머무르지를 못하고 좁은 방구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는 주량이 제법 센 편이라 같이 마시는 사람이 취하는 것을 자리를 파하는 기준으로 삼는데, 혼자 마시는 술은 언제 끊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 기어코 취기가 오를 때까지 마시다 남은 술은 냉장고에 도로 넣어두고 잠에 들곤 했다.
다음 날, 냉장고에 남은 술을 보자니 또 한잔하고 싶어 졌고 당연하게도 성에 차지 않아 새로 사와 마셨다. 그렇게 일주일이 되어도 주량과 술의 공배수를 찾지 못해 결국 집에서 마시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이 자리, 저 자리를 전전하다 이따금씩 가던 와인바에 정착하기로 한다. 재작년, 세종에서 모임 활동을 하며 안면을 터놓은 곳이었다.
시간은 와인바에 활기가 사그라들 즈음으로 정해 예약해 뒀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느지막이 가서는 사장님과 부담 없는 주제로 몇 마디 주고받고, 대화의 공백은 멍 때리는 것으로 채웠다. 적을 두지 않고 떠도는 부랑자들만을 위한 공간처럼, 그곳의 공백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공백을 나를 사유하고 온전히 향유하는 데에 사용했다. 덕분에 나의 불안, 화, 행복, 이상향과 이상형을 고민하며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단조로운 쾌락이 아닌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는 어수선한 충만감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만화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도 짜증의 강을 바라보고 집을 지은 사람이다. 짜증이 범람하는 날에는 쉽게 집이 잠기고 만다. 그리고 강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개 ‘관계’였다. 짜증에도 수많은 장르가 있었지만 잘게 분해해 보면 종단에는 관계라는 소수가 남았다.
예를 들어, 나는 작년부터 불법주정차와 관련된 민원 파트의 업무를 떠안게 되었다. 민원인들은 과태료를 부과·징수당한 사람, 신고를 했지만 불수용되어 현장의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고, 두 경우 모두 자신에게 내려진 처사에 불만을 품고 내게 전화를 걸었다. 따라서 그들은 언성 높여 쏟아내는 언어적 폭력을 화를 삭이는 도구로 채택해 사용했고 듣고 있어야만 하는 나는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나의 화는 전화기 너머로부터 떠내려온 것이다. 내가 가진 정보는 11자리의 전화번호뿐인 익명의 타인으로부터 수취인 착불로 받은 지극히 일방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거친 단어들을 걷어내고 자세히 살피면 전달받아 내 안에서 자란 화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그런 표현을 사용할 만큼 격 없는 사이가 아니었고 당신의 문제는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어 이성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의 암묵적이고 당연한 룰을 어긴 무례는 화근이 되어 새로운 화를 틔워낸다.
다른 예로는, 밖에서의 나는 밝고 쉽게 화내지 않으며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인데 집에만 오면 사람이 옹졸하고 인색해진다. 마음의 여유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지만 구태여 티 내고 싶지는 않아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이 역시도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해 온 가족이 나의 모든 감정과 사건들을 소상히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 여기며 나와 동일시하면서 생기는 문제이다. 결국은 같은 뉴런을 공유하지 않는 별개의 인격체임을 인지해야 하지만 이미 하나가 된 관계를 분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기어코 둘로 떼어내는 것이 정이 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관계의 종착점을 그려보며 화나고 서운한 나를 어르고 달래어 본다. 인상 쓴 민원인과는 수화기를 내리면 전화를 받기 전처럼 절대적 생면부지의 타인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고, 언젠가 맞이할 가족과의 이별의 순간에 사무치는 회한이 나를 관통하며 따뜻하지 못했던 과거들을 자책할 것이다.
관계에서 태어난 부정적인 감정에도 온 우주의 만물과 동일한 시간이 흐르기에 타오르고 커지다 응축되어, 마치 백색왜성처럼 차고 작고 안정적인 형태로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우리가 관계에서 발현된 스트레스에 사로잡히고 단당류 같은 얕은 위로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외려 쉽게 얻는 위로는 스트레스에게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하고 풀무질하게 될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골방의 카프카처럼 불타오르게 만들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방관하라는 말은 아니다. 끊임없이 저항하고 발버둥 치고, 때로는 괴로운 시간들을 음미하며 보내야 한다. 씨앗을 심은 사람이 누구든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은 나이기에, 저항과 발버둥은 거세면 거셀수록 양질의 비료가 되어 어여쁜 꽃을 피워낼 것이다. 물론 피하지도, 거역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스트레스도 존재한다.
지난해 7월, 직장 상사의 갑질로 4달여의 휴직 기간을 가졌다. ‘시련과 실패-도전-극복’, 세 단계에 걸친 과정들이 통상적인 한 사람의 성장기라고 한다면 그 시간들에는 도전과 극복이 생략되어 있었다.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매일, 온종일 그곳에 있었다.
더욱이 20살부터 쉼 없이 달려온 나는 마음의 내구도가 많이 닳아 쉬이 넘길 수 있는 외부자극이 없었다. 사회생활은 짜증의 강에서 퉁퉁 불어버린 채로 유영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것만으로 체력 소모가 극심한 일이었다. 물에서 손에 쥔 모래처럼 흩날리며 사라진 여유는 강바닥 어딘가 퇴적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여, 도로 주워 담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이상향의 대척점에 도달하고 마침내 송홧가루처럼 스트레스를 마구 뿌리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회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사지를 찢어가며 부딪히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도 아니고 마왕 같은 일들은 채비를 마친 다음에 상대해 줘도 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자존심이 상하는 결단이었다. 도리어 나의 업무 스킬이 부족했고, 부조리에는 무력하였고, 미숙하게 대항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다만 평론가 이동진의 말처럼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그리고 나의 선택은 그 성실의 범주 안에 속해있었기를 바라며, ‘나의 성실’에 부지런히 광을 내어 바래지 않도록 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질의 가치가 성실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앞선 세상에서 성숙한 개인으로 자라는 방법은 어쩌면 그리 다양하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