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종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창문 너머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닭날개 900원, 생맥주 1,900원.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과 그 간판을 보고 몇 마디를 나눴다. 저럴 수가 있나? 저렇게 저렴하다고? 신기하다. 다음에 꼭 가보자.
이렇게 하늘로 날려 보낸 약속만 수십 개가 넘으니 뭐 그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질 줄 알았다. 종각 젊음의 거리에 흔하게 보이는 뜨내기 브랜드 정도로 생각을 하고 넘겼다. 기회가 된다면 먹게 되겠지. 생각보다 그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종각에서 보았던 그것은 내가 주로 다니는 상권에 은은하게 번져갔다. 도저히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자꾸 눈에 밟혔다.
싼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엄마가 자주 하던 격언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맥주가 1,900원, 닭날개가 900원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이유가 그리 싫지 않았다. 이천 원도 하지 않는 맥주는 맛있었고, 닭날개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맥주와 닭날개는 확실히 값어치를 했다. 품질과 맛, 적어도 이 두 가지에선 그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간판에 큼지막하게 가격을 써놓은 것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가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00원과 900원은 사실 요즘의 물가를 생각하면 눈을 의심하게 한다. 적당한 가격이었다면 모를까 너무 저렴해서 다소 폭력적으로 보이는 그 숫자에 대한 호기심은 곧 매장과 브랜드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곤 한다.
가격은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는 것에서도 한몫을 한다. 좋은 말로 하면 실패에 대한 부담을 낮춰주는 것, 나쁜 말로 하면 소비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 저렴한 가격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 정도 가격이면 그 이유를 한 번쯤은 뭉게 준다. 우선 지나다니는 사람을 자리에 앉히는 것이 우선이다. 앉히면 반은 성공이다.
가격은 예로부터 훌륭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저렴한 가격을 어필하고, 뒷자리를 9로 맞추는 것. 뻔하다 할 수 있지만 아직도 효과가 있는 것을 보면 가히 클래식이라 할만하다. 그 뻔한 클래식에 나 같은 사람은 호기심을 느끼고 기어이 매장의 문을 열게 한다.
일단 매장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면 간판의 가격이 이해가 된다. 맥주는 300cc다. 1,900원은 또렷하게 적혀있다. 닭날개는 최소주문 단위가 10개다. 그러니까 9,000원짜리 안주다. 간판의 숫자는 정교한 장치인 셈이다. 다른 안주도 매우 많지만 그것들의 가격이 저렴한 것 역시 아니다. 평균 내지는 살짝 비싸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일단 주문한다. 그렇게 주문해도 한 번에 만오천 원을 잘 넘지 않는다. 기분이 썩 괜찮다.
간판을 보고 들어와 메뉴판을 봐도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맥주는 다를 것 없는 시원한 생맥주였다. 거기에 저렴하기까지. 안주들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닭날개는 조금 더 괜찮은 편이었다. 어차피 배부르게 먹는 곳이 아니다. 가격에 이끌려 들어온 만큼 품질에 대한 기대는 크게 안 했다. 오히려 기대치보다는 나은 맛이었다. 장치에 걸려들었지만 내가 당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다른 술집에 비해 확연히 저렴한 맥주 가격에 우린 이미 현혹되어 있다. 쌓여가는 맥주 주문에 덜컥 겁이 났다가도 영수증에 찍힌 맥주 가격을 보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확실히 각인된다. 가볍게 적당히 맥주를 마시기 좋은 곳. 과하지 않고, 저렴하게. 기똥찬 안주를 먹을 생각이었으면 어차피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가 원한 건 저렴한 맥주와 적당한 안주, 그뿐이다.
사실 기나긴 술집과 포차의 역사에서 가격을 앞세운 브랜드들은 종종 있었다. 대학가 앞에서 보이는 것들이 그러하다. 안주의 가격을 2,900원, 3,900원 등으로 통일해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대학생들을 공략했다. 대부분 낮은 품질의 안주지만 풋내기 대학생이 그것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술과 안주가 입에 들어가기만 해도 즐거운 게 그들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대학가의 그런 술집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의 직격탄, 음주 문화의 변화 등이 있었다. 그런 형태의 술집들은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들을 제외하곤 선뜻 발길을 내딛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사라진 존재들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등장했다. 대학가부터, 맛집거리, 핫플에도 종종 보인다. 넓게 더 넓게 퍼졌다.
외식업을 뒤덮은 양극화 키워드가 크게 작용했다. 대학생뿐 아니라 모두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졌다. 직장인도 섣불리 돈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틈을 잘 파고든 것 같다. 이전과 달리 안주의 가격은 적정가로 유지하고 맥주의 가격을 낮췄다. 저렴함의 방점을 옮겨 소비자의 지갑과 기분을 적절히 공략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맥주라는 매개체의 가격에 변주를 준 것이다.
내가 다니는 대학가 상권에 이 브랜드가 자리 잡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려 한신포차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내가 한창 대학가를 누비던 시절 막 그 자리에서 오픈했던 한신포차는 외식 트렌드의 상징 중 하나였다. 그런 과거의 트렌드를 보란 듯이 밀어내고 당당히 가장 핫한 프랜차이즈가 된 것이다.
어쩌면 지금 시장 상황에 가장 이상적인 프랜차이즈일지도 모르겠다. 프랜차이즈의 특성을 살려 강점을 뽐내고 있다. 대내외적인 이슈들로 흔들리는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나름의 안정적인 포지셔닝에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지점을 들어가도 실패가 없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프랜차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브랜드 이미지다.
시장에 안착하는 데는 성공했다. 일식 테마의 가성비 주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었다. 그렇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겨나는 미투 브랜드, 공격적인 확장, 요동치는 물가라는 변수는 여전히 산재하고 있다. 나의 대학가에서 밀려나버린 한신포차처럼 후발 트렌드에 얼마나 확고히 대응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미지수다. 훗날 프랜차이즈의 지향점으로 남을지, 지양점으로 남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