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특급열차

보라카이는 외로워

by 식작가

시계바늘은 21시를 훨씬 넘겼다.


가야할까. 말아야할까. 잡아야할까. 잡지 말아야할까.


몇 십분 전 내게 벌어진 일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속옷 차림으로 이 추운 겨울에 내쫒겨진 것 같았다. 나를 감추고 감싸고 있던 그 모든 것이 떨어져나간 느낌이었다. 내게 주어진 5일간의 설날은 순식간에 짊어져야할 무게가 되었고 나는 그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거실 소파에 베어버린 당신의 채취를 맡는 순간 그건 비참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적당한 가격대의 떠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항공편을 찾았다. 세계지도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곳이 보라카이였다. 스무살, 친구들과 휴양을 즐기러 떠난 지상낙원 같은 곳이었다. 그냥 그 희고 푸른 백사장에 누워있고 싶었다. 눕지 못한다면 눈으로라도 다시 담고 싶었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그곳에서 남은 명절의 무게를 견디고 싶었다. 그곳에선 조금은 희미해지지 않을까.


몇 해전의 기억을 되짚어 해야할 것들을 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호텔을 잡았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고, 사실 그게 전부였다. 큼직한 녹색 캐리어에 여름 옷가지와 수영복을 때려넣고 집을 나섰다. 따듯해지고 있는 요즘이었다. 축축한 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은게 보였다. 그렇게 나는 공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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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설 연휴의 완벽한 시작점에서 공항에 왔다. 사람이 붐비는 것을 끔찍히도 싫어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내가 이곳에 서 있었다. 줄을 서고, 기다리고, 대기하고, 다시 기다리고, 어딘가를 통과했다. 사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보라카이행 비행기에서 혼자 입국수속을 밟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시덥잖은 농담과 쌀쌀궂은 대화가 오고가도, 긴 기다림에 투정을 부려도, 그 속에 서려있는 감춰진 설렘은 상대방과 함께 왔다는 방증이었다.


체크인부터 나에게 혼자 가는 것이냐는 물음을 쏟아냈다. 앞 뒤로 줄을 함께 선 가족 단위 손님들과 일행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혼자 가는 것이라는 대답을 하자 비행기가 풀부킹이라 비상구 자리로 좌석을 드려도 괜찮겠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보통은 추가금을 얹어야지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운이 꽤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일행이 없어서 좋았던 첫 번째 순간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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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와 혼자 산지 이제 7년, 정말 아주아주 오랜만에 격하게 외로웠다. 외로움이란 걸 느껴도 혼자 있는걸 워낙 좋아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 나였다.


공항의 모든 소음을 먹어치우는 탑승장의 카펫들은 내가 아는 모든 소음을 먹어치우지는 못했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제법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가도 웅성거리는 소음이 울려퍼졌다. 나는 그 소음을 조금이라도 듣고싶지 않아 노래를 크게 들었다.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위치한 유행이 조금 지난 노래들을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4년은 지난 노래들이었다.


충전 스테이션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삼일간 머무를 숙소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픽업서비스를 급하게 예약하느라 숙소 컨디션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덜컥 예약해버렸다. 사진상으로는 괜찮아보였지만 끝까지 의심을 거둘수는 없었다.


그리곤 이심을 설치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데이터를 지겹도록 쓰기 때문에 일부러 무제한 옵션을 골랐다. 베스트리뷰어로 선정되면 10만 포인트를 준다는 광고가 보였다. 도전을 할까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

그렇게 보라카이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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