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 두 명이 라스베이거스로 올 예정이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하루 머문 후 내일부터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LA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LA공항으로 직접 이동하여 가족들과 만나 한국에 돌아갈 것이다.
즉, 그녀에게 나를 알릴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다.
오늘 패키지 투어의 주요 일정은 엔텔로프캐니언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황토색 모래사막을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 달려야 한다. 사륜구동 픽업트럭의 짐칸을 개조하여 양쪽에 긴 벤치를 두어 관광객들이 여러 명 앉을 수 있게 한 트럭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잘 알겠지만 소위 ‘두돈반’으로 불리는 트럭과 흡사하다. 이 트럭의 제조사는 일본 도요타다. 미국에도 유수의 픽업트럭을 제조하는 곳이 많은데 왜 자국산을 사용하지 않는지 잠깐 생각해 본다.
트럭 한 대에 약 14명 정도의 관광객이 탑승한다. 우리 패키지 투어의 일행이 약 50명 정도이니 픽업트럭은 4대면 충분하다. 가능하면 우리 가족이 타는 트럭에 그녀도 함께 탔으면 한다. 먼저 트럭에 올라 주위를 살핀다. 그녀 일행은 아직 탑승하지 않았다. 속으로 우리 트럭을 타라고 빌어본다. 하지만 우리 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트럭에 탑승한다. 하기야 그녀가 우리 트럭에 탔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같이 있고 더구나 사방이 열린 트럭 뒷자리에서 뾰족이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아쉽다.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기회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다.
순간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떨어지는 사과를 기다리는 그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공황장애로 인해 이전보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 알고 있다. 이런 나를 그녀가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며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다. 한심하다. 안 되겠다. 공황장애는 잠시 접어 두고 사과를 직접 따 보려 시도라도 해야겠다.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픽업트럭 4대가 동시에 엔텔로프 캐니언 입구로 달리기 시작한다. 거센 황톳빛 모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트럭은 더욱 빠르게 달린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모랫길을 덜컹거리며 달린 트럭은 엔텔로프캐니언 입구에 도착했다. 그랜드캐니언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지만 이곳 또한 장관이다. 미국 영화에서 많이 등장해서 다소 낯이 익은 곳이지만 여기가 그곳 인 줄은 몰랐다. 마치 천장이 뚫린 동굴과 같았고 벽은 오래전에 물이 흘렀던 흔적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무늬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몽환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지금 이미 둘러보고 있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 깊은 곳이다.
오늘 점심은 미국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우리로 치면 원하는 음식을 골라 양껏 먹을 수 있는 뷔페 같은 형태의 식당이라고 한다. 식당 내에서 현지 종업원들에게 줄 팁으로 1달러짜리 지폐를 준비하라고 안내한다. 한국과 달리 여기는 접시를 치워주거나 음료를 채워주는 종업원들에게 팁을 줘야 하는 모양이다. 미국의 팁 문화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만큼 줘야 할지 말이다. 식당은 오늘 저녁 숙박 예정인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중간에 있었다.
난 다른 일행들보다 비교적 식사를 빨리 마치고 나왔다. 저 멀리 우리 가이드가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투어 버스의 현지인 운전기사와 대화를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하고 나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가이드가 그녀와 대화를 해봤는지 먼저 묻는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려는 그때 그녀의 동생이 식당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인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 누나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순간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갑자기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사과가 떨어지기 만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의식 중에 행동으로 옮겨진 것 같다.
동생에게 다가가 혹시 담배를 태우려고 나왔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 여기에 있냐고 물었고 다행히 내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에 나는 동생을 데리고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왔다. 누나에게 직접 말을 건넬 수 없는 상황이니 동생에게 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 추후를 도모할 생각이었다. 얼마 전부터 다시 피우게 된 담배가 여기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가까이에서 본 동생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 보인다. 대학생이거나 혹은 군대를 막 제대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 그녀도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나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진다. 뭔가 시작도 하기 전에 김이 빠지는 기분이다. 20대 중반이라면 그들 눈에 나는 아저씨다.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하지만 굳이 여기에서 시시콜콜하게 나이를 묻거나 호구조사를 할 필요는 없다. 혹시 그녀와 동생 모두 원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타입일 수도 있다고다독여본다.
가이드와 동생, 나 셋이서 그렇게 십여 분 동안 대화를 했으며 무슨 특별한 대화가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의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난 최대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부모님을 미국까지 모시고 관광을 온 바른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이려고 말이다. 그때 그녀가 식당에서 나와 동생을 찾는 모습이 보인다. 동생은 먼저 가보겠다며 서둘러인사를 꾸벅하고 누나 쪽으로 달려간다. 이 짧은 순간 나도 뭔가 인사를 해야 했다.
“어, 잘 가, 처남!”
순간 짧게 적막이 흘렀다. “처남”이라니 내가 공황장애가 아닌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말하고도 정신이 번쩍 든다. 가이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 같다. 물론 뛰어가던 동생도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예? 아, 네..” 말끝을 흐리고 당황해하며 다시 누나 쪽으로 간다.
그렇다. 며칠 전 미국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이 망할 놈의 공황장애 증상으로 인해 자신감과 자존감이 땅바닥을 치고 있던 내가 어렵게 이곳에 와서 그녀를 본 이후에 종일 그녀 생각으로 공황장애가 서서히 잊히고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 더욱 마음이 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 혼자만 상상력이 풍부해져 이미 내 머릿속으로는 그녀와 결혼까지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처남이라니.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 인사를 한다고 나온 말이지만 이건 내가 생각해도 많이 과하다. 나 혼자 이러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느낌이다. 처음으로 그녀의 동생과 짧게나마 대화를 하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신경을 써서 얘기를 했건만 마지막 말 한마디에 헛수고가 됐다.
하지만 가이드의 생각은 좀 달랐나 보다. 처남이란 말에 당황하긴 했지만 “적어도 OO 씨가 누군지 제대로 강한 인상은 남겼네요.’라며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모두가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우리 버스는 오늘의 숙박지인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버스에 올라타 내 자리로 이동하던 중에 동생이 보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생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누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후에는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라스베이거스 시내에 도착 후 패키지 투어 일행들과 헤어져 나 혼자만 친구들이 있는 호텔로 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보니 엄청 반가웠다. 더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친한 고향 친구들을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동부에 사는 친구가 5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서부 LA로 넘어와 함께 자동차로 5시간 정도가 걸리는 이곳 라스베이거스까지 온 것이다. 반갑기도 했지만 생업을 제쳐 두고 며칠의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와준 두 친구에게 고마웠다.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우리 식구들과 친구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나는 내일 친구들과 LA로 간다.
오늘 저녁식사는 패키지 투어의 일정에 포함되어 있던 한 호텔의 식당에서 친구들도 같이 하기로 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식구들은 먼저 식사를 하고 있다. 나와 친구들을 보자 엄마는 무척 반가워하며 얼싸안는다. 시골에서 함께 자란 꼬마들이 장성하여 이렇게 먼 이국 땅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모습이 대견한지 눈시울마저 붉어지신다. 나이가 들면 확실히 눈물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이 익숙하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식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하나 잡고 우리도 식사를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그녀와 동생, 그리로 패키지 투어 내의 다른 일행 총 네 명이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덧붙여 오늘 점심에 있었던 이야기까지 했다. 오랜 친구 사이니 못할 말은 아니었다. 역시나 친구들도 마음에 있으면 제대로 얘기나 해보라고 한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을 건네 보고 상대가 거절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거다. 역시나 둘 모두 기혼자에 아이까지 있으니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면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내 사과는 내가 직접 따야 한다. 내일 아침이면 난 LA로 가야 하니 지금이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더구나 근처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뭔가 해야 한다. 그래도 식사 중인데 어떻게 다가갈 것이며 뭐라고 말을 할까 고민이 됐다. 더구나 같은 자리에 패키지 투어의 다른 일행도 함께 있다. 엄마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이다. 친구들이 옆에 있어 평소보다 용기가 나서 그랬을까? 나는 지갑에서 100불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그녀 쪽의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동생을 불렀다.
“처남! 식사 중에 미안한데, 이거 받아.”라고 말하며 100불을 건넸다.
어차피 점심에 있었던 ‘처남 사건’으로 인해 이미 내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든 각인이 되어 있을 테니 이왕 들킨 내 속내를 은연중에 한 번 더 알리려고 했다. 이런 곳에 여행을 와서 여자에게 집적댄다는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동생과 친해 보이는 모습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치밀한 계산법이다. 물론 처남이라는 말에 그녀 또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황당해했겠지만 그건 나중에 해명하려고 한다.
당연히 동생은 난데없이 100불을 받자 당황해한다. 나는 그럴싸하게 “여기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다. 이런 곳에 왔으면 한 번 즘은 해보는 것이 좋은데 이왕이면 돈을 따면 좋지 않겠느냐. 그러려면 본인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해야 딴다. 이 돈으로 게임을 해서 따게 되면 두 배로 갚아라.”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동생은 한사코 거절했으며 여기에 그녀도 합세하여 몇 번이고 거절했다. 그다지 큰 금액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 100불을 계속 거절하자 나도 당황했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받고 ‘고맙습니다. 따면 두 배로 갚을 게요.’라고 하고 끝냈을 것이다. 나와는 여러 모로 다른 것 같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 더 호감이 간다. 하지만 이 돈을 건네지 못하면 상황이 오히려 더 이상해질 것 같다. 반드시 건네야 한다. 상황이 길어지면 맞은편에 앉아 식사 중인 두 모자에게도 민폐다.
나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 미안해서 이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려 주고 싶은 것이며 내일부터는 일행들과 떨어져 LA로 갈 예정이라 지금 동생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가 서로 볼 일이 없을 테니 꼭 지금 주고 싶다. 부담 갖지 말고 받았으면 한다. 혹시 게임에서 잘 되면 나중에 갚으면 된다.”라고 말하며 기어이 건넸다. 물론 다음에 만나려면 서로 이름과 연락처를 알아야 하지만 당연히 모른다. 단순히 돈을 건네기 위한 핑계였다. 그렇게 겨우 돈을 건넸다. 그들은 이제 나를 처남이라고 불렀던 사람 혹은 100불을 줬던 사람으로기억할 것이다.
돈을 건네고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맞은 편의 중학생 어머니가 농담인지 진심인지 “어머, 우리 아들한테는 안 주나요?”라고 묻는다. 당황스럽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아주머니, 아쉽지만 중학생은 카지노에 못 들어가요.”
그날 저녁 식구들, 친구들과 함께 늦은 시간까지 라스베이거스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밤늦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가족과 그녀를 뒤로하고 LA 친구네 집으로 갔다. 머릿속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내가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