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mpunyee Feb 25. 2021

기다림의 끝과 좌절(공황장애와 결혼#18)

끝난 것 같은 인연이 다시 계속되려 하지만...

더 이상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날아갈 듯 기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놈이 왔을 때의 두근거림과 물리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지만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건강한 두근거림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문자 메시지였고 더구나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아닌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 농구를 멈추고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신호음 후에 그녀가 바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라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봐서 조금은 당황한 모양이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내가 곧바로 전화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통화 내내 들려오는 그녀의 톤이 높은 목소리가 왠지 좋다. 미국에서 대화했을 때의 그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내용을 들어보니 9박 10일 일정으로 미국 서부로 패키지 투어를 했던 우리 가족과 달리 그녀는 서부와 동부를 모두 여행하는 14박 15일 일정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동부로 이동하여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한국으로 이틀 전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녀와는 끝난 것인 줄 알고 혼자서 온갖 상상을 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긴 여행의 피로 탓인지 거의 이틀 내내 쉬었고 비로소 오늘 제대로 휴대폰을 확인하니 내가 보낸 메시지가 보여 회신을 했다는 거다.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됐든 지금 이렇게 통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대체 어떤 일을 하길래 15일 동안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여행 후 이틀 동안 쉬었다고 하니 거의 20일 가까이 쉬었다는 셈이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학생인가? 학생이라면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 아니면 회사에서 퇴사를 하고 여행을 간 것인가?’ 온갖 상상이 든다. 하지만 정식으로 처음 대화를 하는 이 시점에서 대뜸 직업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소위 꼰대 짓이다. 절대 물어서는 안 된다. 하기사 그런 것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내가 지금껏 살면서 '이 사람'이라고 생각한 누군가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가 다가간 적이 있던가? 오히려 그런 정보가 많을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상상력이 오염만 될 뿐이다. 그냥 이 사람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는 거다!


전화통화 말고 최대한 빨리 그녀를 눈 앞에서 직접 보고 싶었다.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다음 주 월요일에 만날 수 있을지 물었다. 꼭 만나야 한다는 강력한 말투로 물었다. 나를 만나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그녀에게는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이 당혹스러울 수 있으나 난 지금 그런 배려까지 할 경황이 없다. 마치 메시지를 보낸 후 지난 7일 동안 겪었던 맘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는 듯 말이다. 물론 그녀가 나에게 맘고생을 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다음 주에 만나자는 말에 그녀는 즉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이 혹시 거절로 이어질까 불안한 나는 바로 끼어들어 라스베이거스에서 내가 준 100불로 혹시 게임을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생은 한국 나이로 21세이지만 미국에서는 만 20세가 넘지 않아 카지노에 들어가다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순간 ‘동생이 21세라면 도대체 그녀는 몇 살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만나야 했기에 “그럼 그 100불로 저랑 밥 먹으면 되겠네요.”라고 하며 집요하게 제안했다. 나의 이런 끈질긴 제안에 결국 그녀도 승낙을 했고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첫 만남에 대한 약속을 했다.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다. 농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대리점 사장님도 이런 상황을 내심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땡볕에 땀을 흘리며 농구를 하는 내 모습이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운동에 집중하는 그럴싸한 모습으로 보였다. 마치 ‘이 몸이 지금 비록 운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마음이 매우 아픈 몸이란 말이다.’라고 혼자 스스로를 가엾이 여기고 있었지만 그녀와의 통화로 다시 희망이 생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현실로 돌아와 당장 그녀와 만나야 할 곳을 먼저 물색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인간적이다. 미국 여행을 가기 직전에 공황장애 증상이 급격히 심해져 여행에 가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찔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해 보면 공황장애의 증상, 즉, 공황발작은 확실히 몇 가지 특정 상황일 때 오는 것 같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번의 경험에 의하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 특정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오는 경우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기 때문에 가장 당황스럽고 그 강도도 가장 크다. 버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당장 죽을 것 같은 극도의 두려움이 든다. 참기 힘들어 결국 119에 연락하거나 응급실행을 선택하기도 한다. 문제는 진정된 이후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매우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여겨 삶의 의욕이 꺾이다 못해 사라지고 종종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터널에서의 내 경우가 그랬다.   


둘째는 우연히 어떤 상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하는 순간이다. 예를 들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보며 업무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던 중 갑자기 뭔가 심장을 콕 찌르는 느낌이 든다. 이런 증상이 한두 차례 들다가 곧 괜찮아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나의 경우 순간 ‘이게 혹시 심근경색의 징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집중되어 ‘혹시 심장으로 이어지는 혈관에 혈전이 생겨 곧 갑자기 막혀 려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그러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있다면 그 공포와 불안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 그놈을 만나게 된다. 꼭 심장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반적인 수많은 상황이 결국 그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는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특정 공간에 놓이게 되는 경우다.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 버스 그리고 비행기 안이 이런 상황이 해당된다. 다행히 언제든 이 상황을 피해 내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같이 비교적 짧은 거리나 시간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또한 같은 버스라고 해도 마음대로 내릴 수 없는 고속버스와 달리 시내버스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혹시라도 그놈이 올 것 같아도 언제든 그 자리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넷째는 신체적으로 매우 피곤할 때이다.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그놈은 온다. 하지만 컨디션이 나쁠 때는 훨씬 쉽게 그놈이 온다. 특히 술을 마신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놈까지 오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이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와 같이 이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보통의 상황들이 지금 나에게는 문제가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늘 겪는 일들이 내가 보기에는 뭔가 대단한 것을 해내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나에게는 모두가 피하고 싶은 상황인데 말이다. 이런 내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그러다 보니 공황장애를 겪은 이후에는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일 자체를 가급적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누군가를 만나려 하고 있다. 이런 마음이 생긴 자체가 고맙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나의 상황에 대해 미리 알린다면 나를 이해해 줄까? 여러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고생했다. 스스로의 어깨를 다독여본다. 그래 나중에 걱정하자. 일단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자.




월요일이다. 마침내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상기되어 심장이 두근거린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다. 뭐랄까? 아랫배의 깊은 안쪽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명치까지 이어져 왔다가 멈추고 다시 오기를 반복하는 느낌이다. 귀찮지만 기분 좋은 간지럼이다. 저녁식사를 할지 차를 마실지 정하지 못한 상태로 만나기로 하여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다. 일단 우리 회사 근처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퇴근을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로비의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는 바로 띈다. 밝지만 과하지 않은 밝은 색의 원피스 차림이다. 하얀 피부와 여전히 큰 눈이 더욱 돋보인다. 미국 여행 때의 여행 복장을 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무척이나 다르다.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이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휴대폰을 보고 있느라 내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는지 조금은 놀랜 기색이었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도 인사를 한다.


미국에서 같은 여행객으로 처음 만나서 생긴 서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런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지금의 상황이 서로 어색한 것 같다. 이 어색함이 길어지면 낭패다. 나는 재빨리 식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이 좋지 않으니 식사 대신 차를 마시자고 한다. 우린 호텔 내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차로 주문한다. 저녁식사 시간이라 커피가 부담스러운 것일까? 나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예쁘게 보이는 디저트도 두 개 주문했다. 호텔 커피숍이라 그런지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각오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내 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버스에서 처음 봤을 때의 느낌 이후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던 과정 등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털어놨다. 내 이야기를 경청하느라 그런지 몰라도 그녀는 주문한 디저트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왠지 신경이 쓰인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그녀의 나이가 궁금하다. 그녀의 동생이 21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욱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상대가 매우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OO 씨의 나이, 직업 등등 궁금한 게 많은데 묻지 않으려고요. 이런저런 정보를 알게 되면 미국에서 느낌이 좋았던 OO 씨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O살의 OO 씨, OO 일을 하는 OO 씨의 이미지가 강해질 것 같네요.’


내 질문에 그녀는 살짝 웃더니 본인과 내가 나이 차이가 꽤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미국에서 내가 우리 가족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 그녀는 내가 당연히 결혼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고 우리 누나와 내 여동생 중 한 명이 내 아내이겠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즉, 나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내가 한국에 돌아와 자신에게 연락을 해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고 미국에서 그녀의 동생에게 처남이라고 살갑게 부르며 챙겨준 것도 그저 나이 많은 아저씨가 진짜로 자신의 어린 동생을 예쁘게 봐서 챙겨준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의 나이가 27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8세인 나와 11년이라는 차이가 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많을 줄은 몰랐다.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다음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희망아 사라지지 말아 줘 (공황장애와 결혼#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