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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03. 2023

산은 준 것도 없는 내게

경북 내음 담뿍 담아


가이드라는 직업은 단 한 장소도, 한 지점도 허투루 보지 않게 한다. 성주에 있는 참외 가로등도, 울산에 있는 고래 그림의 하수구 뚜껑도. 거기다 주말마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다니는 부모님의 딸로 자랐다면 머리와 가슴은 더욱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싶다. 줄기차게 사회탐구 과목과 함께 자라며 한국지리를 좋아한다면,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도에 검정 사인펜으로 마킹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면 나만의 지도에 점을 찍고 위치들을 머릿속에 묶는다. 성장과정에 스며있는 모든 요소들이 여행을 떠나게 한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저장해 둔 ‘내가 좋아하는 곳’, ‘나만의 도시’, ‘나의 산’을 찾아간다.


가장 좋아하는 산은 청송 주왕산. 처음 산에 끌렸던 점은 ‘완만함’이었다. 등산을 즐겨하진 않으나 늘 산이 이끎을 느낀다. 헉헉거리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와 위안을 주는 산에게 고마움이 든다.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게 감사할 때면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무에, 꽃에, 날씨에, 하루에 그리고 이 산에 마음속으로 고맙다 인사하고 있을 찰나 산은 더 큰 선물을 준다. 평소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맑고 또렷하게도 들려주는 폭포는 귀와 눈, 마음의 탁한 겹을 함께 씻어 내린다. 이곳 주왕산에 살았던 용도 승천하며 지상에서의 짐을 털어내 버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우리도 진정으로 날기 전엔 무척이나 무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자신을 밟는 것 말곤 준 것도 없는 내게 더 내어줄 것이 남았다.


아버지는 구경을, 어머니는 구매를 좋아하셨다. 가족을 이끈 곳은 시장이다. 삶의 소리가 울려 퍼졌고 눈과 코를 자극하는 지역 음식은 끝없이 자리하여 아버지의 동공과 어머니의 지갑을 연다. 나는 입을 열어 먹기에 바빴다. 새벽시장, 직판장, 도로 위 제철 과일 등 갖가지 지역 특산물은 곧장 할머니 댁으로 왔고 할머니는 항상 네다섯 가지의 나물을 만들어 맞이해 주셨다. 여행과 효심이 담겨 다시 나에게 온 비빔밥은 그렇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산은 할머니보다도 더 다양한 비빔밥을 내어주는데, 산이 위치한 지역마다 계절마다 비빔밥은 조금씩 다르다. 어디 비빔밥뿐인가, 산으로 향하는 길이면 언제나 양쪽으로 자리한 밥집들에 구수한 파전 지지직 구워지는 귓가 울리는 소리가 나를 에워싼다. 동동주와 도토리묵, 손두부의 맛과 향, 그리고 구수한 소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각에조차 산에게 감사하게 한다.


달리던 차가 세워진다. 뒷좌석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어머니는 바깥에서 무언가를 고르신다. 건물은 잘 찾아볼 수 없는 산과 논 그 사이 어느 지점 항상 트럭이나 컨테이너가 있다. 손으로 집어도 보고 건네주는 자투리를 먹어도 보며 상태를 확인한다. 사실 어느 정도의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이미 차는 멈춰 섰다. 그저 어느 정도를 살지만 내려서 결정하는 것이다. 트렁크 가득 채운 사과 친구들은 그렇게 청송을 떠나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다. 곶감의 계절엔 산청으로, 대추를 사러 보은으로 떠나는 부모님을 보면서 가끔 특산물이 없다면 나의 부재에 부모님의 적적함은 누가 채워드리나 생각한다. 전국 먹거리가 나에겐 퍽 고마운 존재다. 길 가운데에서 샀던 사과와 가끔 나타나는 귀여운 사과 정류장은 사과=청송이 되어 머릿속에 저장된다. 나중에 세계여행을 하며 다른 맛있는 사과를 만날지언정 생각날 영원한 나만의 ‘사과의 도시’가 된다.


부모님은 월 단위로 목욕탕을 끊어 매일같이 가신다. 여기저기 쑤신 곳이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좀 낫다 하신다. 그렇기에 가족의 여행은 목적이 온천이 되기 일쑤이다. 생각지 못한 대목에서 자동차는 온천으로 향한다. 운전을 오래 해야 할 때나, 멀리서 집에 가는 길에나, 할머니를 모시고나, 산에서 내려왔을 때나. 청송 약수탕의 효험은 두말할 것도 없는 곳이니 부모님을 위한 청송 여행에서 목욕을 빼놓을 순 없다. 야외온천탕은 엄마를 웃음 짓게 하고 나에겐 엄마와의 시간을 선물한다. 주왕산의 용추, 절구, 용연 세 폭포에 이어 ‘물’에게 감사한 순간이다. 딸의 안마 없이도 당신의 아픔을 잦아들게 하는 면에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선 합격이다. 그러나 어렵기도 하다. 도시브랜드인 ‘산소 카페’는 ‘어디에 카페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연기 나는 공장 하나 없는 청정도시 청송은 ‘산소 카페’라는 용어가 눈에 띄게 많이 생겼다. 왠지 옆 동네 의성도, 군위도 그리고 영양도 공장은 없고 공기가 좋을 것 같다. 청송만의 공기를 차별화된 방법으로 알릴 순 없을까 하는 생각까지 다다른다. 아니나 다를까 외부인이 잠깐 하는 고민은 지역민들에겐 일상일 터, ‘산소산업단지’가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전국 최대 산소산업 파크가 만들어진다 하니 이 랜드마크가 도시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라 하니, 왠지 떠나기 싫다.


사계절 내내 소나무처럼 푸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사람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 예로부터 절개를 상징하는 군자목이었을 것이다. ‘청송’이기에 늘 푸를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청송에서 만난 주산지는 ‘늘 푸르지 않아도 괜찮아’라며 토닥여준다. 철마다 변할 수 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주산지의 계절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왕산을 3대 암산이라 하지만, 처음 완만하게 내게 다가온 그 모습처럼 굴곡지지 않고 완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살다 보면 경사는 어차피 찾아오는 것이니 내면만큼은 오르막, 내리막 없도록 잔잔하고 싶다. 어디에도 찰랑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단단할 때 가능하다. 석병(石屛, 주왕산의 옛 이름), 돌 병풍과 같은 굳은 심지가 필요하다.







산은 준 것도 없는 내게 물과 양식, 산소까지 내어주곤 나아갈 길마저 알려준다.





단단하지만 유연함을 가진 주산지 같은 사람이 되련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주왕산 같은 사람이 되련다. 비록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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