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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97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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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Feb 29. 2024

사람은 변해도 안 죽는다

에세이

“너 민초파였어?”     


키오스크 주문대에서 ‘민트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고르자 친구가 놀란 듯이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 안 먹었는데 요새 맛있더라고.”

“신기하네, 예전엔 안 좋아했잖아.”     


두 달 만에 만난 친구가 주문 버튼을 마저 눌렀다. 신기해할 만했다. 나는 카페에 가면 항상 같은 메뉴만 마시고, 좋아하는 영화를 열 번 이상 보고, 지름길이 있어도 익숙한 길로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익숙한 게 편해서’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입맛이나 취향이 조금씩 변해갔다.     


달아서 좋아했던 디저트에 같은 이유로 손이 가지 않게 되었고, 금요일 밤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공포영화를 찾던 내가 눈물 쏙 빼놓는 감동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뿐더러, 그제는 잘못 든 길을 호기심에 걸어보기도 했다. 나조차 이런 변화가 어색해 본가에 갔을 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살면서 변한 부분이 있어?”

“글쎄, 더위를 잘 타게 됐다는 점? 갱년기라 그런가 봐.”     


에어컨 온도는 26도로 충분하다던 그녀가 리모컨을 들어 23도까지 내렸다. 나는 쌀쌀한 팔을 쓸어내리며 재차 물었다.     


“또 없어? 전에는 안 좋아했던 걸 좋아하게 됐다든가.”

“수영 배우기 시작한 거랑 산악회 들어간 거 빼곤 없지.”

“뭐? 산악회도 들었어?”

“응. 너도 따라올래?”     


삭신이 쑤신다며 쉴 틈이 나면 눕던 엄마인데, 근래 들어 운동을 시작했다. 수영장이 멀다며 툴툴댈 땐 언제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수영장으로 향하고, 낯가린다며 거절하던 산악회도 가입했다. 예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에게는 작지 않은 변화였다. 나이가 들면 취향이 확고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줄 알았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녀가 내게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니, 영 그런 것도 아니더라.”      








사람은 쉽게 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애인하곤 이전과 같은 이유로 싸우고, 업무는 매번 비슷한 부분에서 틀리며, 매해 연초엔 작년과 다를 바 없는 새해 계획을 짰으니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쳇바퀴가 팅- 하고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습관이란 게 무서워서 7시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질려 요새는 아침에 산책하기 시작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은 비슷했다.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노부부와 빠른 속도로 조깅하는 아저씨, 강아지와 산책하는 내 또래의 여자까지. 우리 동네에 산책로가 잘 되어있는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지도 몰랐다. 걷다가 더우면 벤치에 앉아 쉬기도 했다. 옆 벤치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나누는 인사가 귀에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요새 통 안 보이더니 뭐 하고 지냈어?”

“어휴, 남편이 현장에서 일을 하다 삐끗해서 얼마나 고생인지….” 

    

오랜만이라면서 어제 만났던 것처럼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부러웠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친구도 별로 없으니까. 그러나 점점 익숙해지는 사람들과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위로받았다.     


앞으로 집세는 어떻게 내지, 이전보다 나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다른 친구들은 차도 사고 결혼 준비도 한다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지새우던 밤들이 벌써 까마득했다. 퇴사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무르지만도 않더라.     


“읏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보였다. 코스모스는 더 활짝 피었고, 어제 비가 내린 덕에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오늘은 구직사이트도 보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에게 연락도 해봐야지. 어제와 다른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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