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바깥으로, 혹은 바깥에서 안으로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보았다. 비슷한 면이 있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극 중에서 인물들이 고통을 해소하는 방식이 상이하다. 한 영화는 예술을 통해 인물들이 다시 삶으로 복귀하는 것 같았으나, 한 영화는 예술을 통해 삶을 봉인하는 것 같았다. 두 영화의 비슷한 점은 창작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 또한 작가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창작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다. <센티멘탈 밸류>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촬영장에서, <햄넷>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이 열리는 극장에서 찍혔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두 개의 장면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샌티멘탈 벨류>가 창작을 매개로 인물들이 각자 품고있던 고통이나 갈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햄넷>은 작품에 고통을 영원히 묻음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인물들을 이끌어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을 통해 과거에 종속되었던 무언가에서 벗어난 자와, 작품에 영원히 갇힌 자의 차이가 두 영화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햄넷> 속 아녜스는 어딘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녀를 숲속의 마녀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다만 남들보다 더 멀리 이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아녜스가 숲과 맺는 관계는 특별하다. 이는 특히 출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첫째와 달리 둘째의 출산 당시 강물이 범람할 정도로 폭우가 쏟아져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된 아녜스는 자신의 아이는 숲에서 낳아야 한다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햄넷과 주디스는 집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주디스와 달리 햄넷은 줄곧 건강하게 자랐지만 주디스가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프던 어느날, 햄넷은 주디스 옆에 같은 모양으로 누워 주디스의 죽음을 가져갔다. 햄넷의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아녜스와 셰익스피어의 사이에도 변화가 생긴다. 아녜스는 햄넷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셰익스피어를 용서하지 못하고, 셰익스피어 자신 역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게 연극 <햄넷>이 탄생한다.
아녜스는 아들의 이름으로 공연이 올라간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극장을 찾는다. 극의 배경이 되는 것은 아녜스가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는 숲이다. 연극은 바로 이 숲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극중 셰익스피어는 햄넷의 죽은 아버지 역할을 맡고, 햄넷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다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른다. 처음에는 극에 집중하지 못하던 아녜스 역시 어느새 연극에 동화되어 햄넷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햄넷이 쓰러지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아녜스가 그 손을 잡는다. 그런 아녜스의 모습에 다른 관객들 역시 햄넷의 손을 잡듯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아녜스는 그 광경을 지켜본다. 결국 극중 햄넷은 숨을 거두고 쓰러졌으나 그 순간 아녜스의 눈에 죽은 자신의 아이, 햄넷이 보인다. 햄넷은 아녜스를 바라보고 두 사람은 잠시동안 눈을 마주친 뒤 햄넷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숲에서 태어났어야 하는 아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햄넷>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찍힌 것과 대조적으로, <센티멘탈 밸류>의 마지막 장면은 딸 노라가 아버지 구스타브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장면이 버드 아이 샷으로 찍혀있다. 카메라는 공중으로 올라가며 촬영장의 모습이 한눈에 담기는데, 이때 인물들의 모습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센티멘탈 밸류>의 주요한 모티프 중 하나는 가족의 죽음이다. 구스타브가 촬영하려는 영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며, 애초에 이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구스타브의 아내이자 노라의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이었다. 또한 노라 역시 과거 자살을 시도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치 더 이상 죽음이 그들을 따라다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라가 촬영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자살 시도를 암시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마도 구스타브의 "컷, 오케이" 와 함께 노라가 되돌아간 장소는 자신의 실재하는 아버지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센티멘탈 밸류>는 이처럼 영화 외부의 실재하는 삶의 공간, 외부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면서 영화 속 인물들이 마치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다.
하지만 <햄넷>은 어떠한가, 아녜스와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외부로 자신들을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고통은 그런 식으로 치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영원히 회귀하는 주제, 작품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극 중 셰익스피어는 연기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가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괴로움에 울부짖는다. 나는 그의 눈물이 차마 예술만으로는 승화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깨달은 자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예술에 나의 고통을 묻어둘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땅속에 언젠가 찾으려고 하는 보물을 묻어둔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예술의 힘은 치유가 아니라 영속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할 따름이어서 정해진 죽음을 피해 갈 방법이 없지만, 작품 속에 남겨진 인간은 영원히 살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