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쏟아졌다. 잠시 멎는가 싶다가도 다시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하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비구름만이 가득했다. 전국적으로 기록적인 강수량 때문에 지방의 민가와 농작물의 피해가 심했다. 곳곳이 폭우를 감당하지 못해 물에 잠겼고, 이재민이 생겼다. TV 화면으로 쑥대밭이 된 상황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언덕 위에 사는 것이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라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집까지 물에 잠기려면 우선 언덕 아래의 땅부터 모두 물에 묻혀야 했다. 그런 끔찍한 상상에 닿자 비가 여신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리는 형벌 같았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이 한 쌍씩 방주에 탔고, 하나님은 며칠 동안 비를 내리게 했다. 세상은 수몰됐고, 살아남은 생물은 땅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면 나는 가장 먼저 수진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기로 다짐했다. 최후의 인간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후를 미루어 남은 시간을 수진과 보내고 싶었다. 함께 내리는 비를 보며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도 제법 괜찮은 말로였다. 인영과 재준은? 인영은 똑똑하니까 아마 도서관의 책과 가구들로 작은 배를 금세 만들 것 같았다. 재준은 빨간색 수영복만 있으면 충분했다. 비가 아무리 내려도 그는 살아남을지도 몰랐다.
장마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끝이 났다. 느닷없이 장마가 완전히 물러갔고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수진의 입국일이 다가왔다. 나는 비행기 도착 시간을 수진에게 다시 물어 확인했다. 수진은 괜히 힘들여 나오지 말라고 거듭 말했지만, 나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꼭 가겠다고 했다.
일찍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아주 큰 공항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친구라거나 가족끼리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수시로 찾으며, 잘 따라오는지, 길을 잃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가끔씩 동행 없이 혼자로 아주 큰 캐리어를 끌고 지나는 사람도 있었다. 홀로 하는 여행은 어쩐지 외로울 듯했다. 수진은 괜찮았을까. 혹시나 외로웠어도 이제 곧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내가 수진에게 조금은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약속된 시간보다 더 기다렸다. 수진이 타고 있을 비행기가 착륙했고, 입국 수속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검은색 모자를 눌러쓴 수진이 보였다. 인파 속에서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수진을 가볍게 안았다. 들고 있는 짐들과 피로 때문인지 몸은 몹시 굳어 있었다. 나는 얼른 수진의 배낭과 짐을 나눠 들었다.
“잘 갔다 왔어?” 수진은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다시 물었다. “어땠어?”
“좋았어.” 수진은 내게 눈길을 주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뒤따라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좀 피곤해.”
반가운 마음에 피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시차의 문제도 있을 것이었다.
“집까지 같이 갈게.”
“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
“짐 혼자 가져가기 힘들지 않아?”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혼자만의 시간. 나는 그 가마득한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껏 우리는 홀로 있지 않았나.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수진은 여행 내내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별 말 없이 지하철을 탔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진의 캐리어를 꼭 붙잡고는 눈치를 살폈다. 수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내가 곁에 있지만, 수진은 홀로 있는 듯했다. 곧 친숙한 역의 이름이 안내됐다.
수진이 눈을 떴다. “영수야 먼저 내려. 나 혼자 갈게.”
혼자만의 시간.
“알았어. 도착하면 연락해.”
나는 수진에게 짐을 건네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지만, 수진은 금세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수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지하철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출발했다. 수진의 검은색 모자가 서서히 멀어졌다. 지하철에서 하차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빈 승강장에 서 있었다. 갑자기 진정 홀로된 기분이었다. 수진이 여행을 떠난 내내 나는 혼자였고, 사실 아주 처음부터 나는 혼자였으면서 새삼스레 외로운 듯했다. 이런 느낌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생소한 감정에 휩싸인 채로 하루를 보냈다. 수진이 도착할 시간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걱정은 됐지만, 수진이 내게 부탁했던 혼자만의 시간과 그에 따른 공간까지 기꺼이 내어 줄 마음이었다. 그만큼 거대한 시공간이 내 곁에서도 비로소 드러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