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70

by 청화

다음 날 점심이 지나서야 수진의 연락이 왔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 전처럼 당연한 일인 듯 집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곧바로 수진의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진을 보고 싶었고,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떤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했는지, 무엇을 진지하게 느꼈는지 빠짐없이 듣고 싶었다.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수진은 침대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


“이제 좀 괜찮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기다렸어.”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는 수진의 옆자리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수진은 흠칫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낮은 탁자를 넘어갔다. 나를 마주보고 바닥에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이 생경하여 수진의 거동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심각하게 입을 뗐다.


“나 할 말 있어. 여행 가서 정말 많이 고민했어. 이제는 너한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고백?”


“그러니까.” 수진의 시선이 잠시 방황하다가 차갑게 돌아왔다. “나는 수진이 아니야.”


“그럼?”


“내 이름은 수빈이야.”


“수빈? 그건 가명이었잖아.”


“이름이랑은 상관없어. 나는 김수진이 아니야. 그게 중요한 거야.”


“여행에 다녀와서 새로 태어났다, 그런 뜻이야? 그 정도로 여행이 좋았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고!”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말 그대로, 나는 김수진이 아니야. 김수진은 내 동생이야. 나는 김수진 언니고. 쌍둥이 언니.”


“쌍둥이 언니?”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둔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였다. 증명사진에는 수진의 얼굴이 있었고, 이름은 김수빈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또 다시 수진의 얼굴이었고, 이름은 김수진이었다. 나는 두 사진 속의 얼굴과 눈앞의 수진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나는 김수진이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머리가 복잡해지더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열이 얼굴까지 퍼졌다. “그럼 넌 누구야?”


“김수빈.” 그 이름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니까 네가 수진이 아니라고?”


“그래. 나는 수진이 아니야.”


거듭 확인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착시현상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수진이 있는데, 사실 수진이 아니라 수빈이라는 말이었다. 수빈? 그게 누굴까?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수진의 집에서 나와 함께 앉아 있을까?


“수진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부정해도 소용없어. 내가 김수진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이제 재미없어. 장난 그만해. 수진아.”


“너는 이게 장난 같아?”


“그럼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는 수진이야. 내가 너도 못 알아볼까봐 그러는 거야? 수진이 맞잖아.”


그녀는 나를 무섭도록 응시했다. 이질적인 눈빛이 스쳤다. 그 변화가 한 인간 안에서 내보일 수 있는 일면 중 하나인지, 타인이어야만 나타낼 수 있는 다른 모습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고한 시선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생경하게 번득였다. 서늘했다.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바짝 돋아 올랐다.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머릿속의 수진과 눈앞의 수진을 비교했다.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수진이 아니야. 정말 미안하게 됐어.”


나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입을 뗐다. “이번 장난은 너무 과했어. 이제 그만해. 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비 내리는 날, 네 생각도 많이 했고. 네가 없는 동안 힘든 일도 있었어. 나는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어.”


“나는 수진이 아니야. 장난이라고 생각하든 진실이라고 생각하든, 그건 네 자유니까 네 마음대로 생각해.”


정적이 흘렀다. 나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수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방이 거짓이고, 이 상황이 거짓이라 해도 수진만은 참이었다. 내가 참이라고 믿는 것뿐인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눈앞에 수진이 있는데, 나는 수진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수진이 아니라고 고백한 순간부터 나를 꼿꼿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어떤 것보다 수진의 것이 아닌 듯했다. 나의 모든 곳을 눈에 담으려는 수진의 것과는 달랐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먼저 알아보는 수진이 아닌 듯 했다. 혼란스러움을 뚫고 치아에서 경미한 통증이 일었다. 성가신 치통과 함께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혀로 교정기 겉을 몰래 훑고는 말했다.


“내가 달라진 점은 없어?”


“무슨 소리야?”


“내가 달라진 점.”


그녀는 나를 자세히 살피더니 말했다. “모르겠는데? 혹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수진이 아니야. 이제 네가 보지 못하는 곳을 일부러 보지 않아.”


나는 그녀의 말에 놀랐다. 어지러웠다. “그래 만약, 네가 정말 수진이 아니라면,”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진이는 어디 있어?”


“마음의 준비하고 들어. 이제 너도 알아야 해. 나와 함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래서, 어디 있는데.”


“죽었어.”


목과 쇄골 사이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살을 뚫고 튀어 오르는 듯했다.


“이제 그만해 수진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사실을 말할 뿐이야.”


“이건 선을 넘었어.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쉽게 하는 말 아니야. 너는 친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나 보지?”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여행 다녀와서 좀 어떻게 됐나봐. 좀 더 쉬어. 나중에 얘기하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 가려고? 너, 갈 데 없잖아.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거잖아.”


“그래. 돌아올 거야. 그동안 너도 좀 쉬어. 아무래도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내가 사실 수진인데, 정신이 이상해져서 이중인격자처럼 수빈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어차피 네가 다시 돌아와도 변한 건 없을 거야. 내가 수진이 아니라는 건 바뀌지 않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화를 냈지만, 몹시 어줍은 외침이었다. 차마 수진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수진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나의 몸이 본능적으로 수진에게로 향하려는 분노를 틀어막는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수빈이고. 너한테 사실을 말할 뿐이야. 네가 이제부터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이야. 내 말을 듣고 그냥 받아들여. 나는 수빈이고, 수진이는 죽었어.”


사고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수진을 바라보았지만,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흐렸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는 나와 무관했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보던 그녀는 수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영수야, 오늘은 더 얘기할 상태가 아닌 것 같아. 우선 돌아가.”


“돌아가라고? 돌아가서?”


“내일 다시 와. 수진이를 보고 싶든, 수진이 얘기가 더 듣고 싶든 이유는 상관없어. 이유는 네가 알아서 선택해. 그것까지 내가 정해줄 수는 없어.”


“내가 다시 안 오면?”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녀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녀와 함께하는 이 공간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집 안에서는 모든 감각과 이성이 마비되고 주술에 걸린 듯했다. 숨을 쉬는 것도 신경을 써야 했고, 몸을 움직일 때에도 상당히 의식을 해야만 했다. 물속에 오래 잠수한 것처럼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


“돌아가.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와.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야.”


나는 다리를 움직여 한 발자국씩 걸었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현관을 나섰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수진을 기다렸다. 어서 빨리 내게 달려와 지금까지 모든 것이 장난이었다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할 수진을 기다렸다. 짓궂은 장난의 끝을 고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다가 부리나케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분명 수진의 목소리였다.


“수진아?”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해. 말했잖아. 난 수진이 아니라니까?”


나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다 장난이겠지. 쌍둥이 언니라니. 그래, 장난일거야. 하지만 손은 무섭도록 떨려왔다. 자꾸만 이질적인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수진이 아닌 것만 같은 순간이 아니라, 진실로 수진이었던 순간을 찾기 시작했다. 돌이켜 볼수록 기나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어떤 한 순간도 수진 같지 않았다. 내가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마음은 그녀를 수진이라 여기는 듯했지만, 심장은 저항하듯 쉴 새 없이 고동쳤다.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정확히 구별하고 정의하고 싶었다. 지체할 수 없었다. 그가 수진인지 수빈인지, 내게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내가 왜 상처를 받아야만 하는지, 그녀에게 한시라도 빨리 묻고 또 물어 답을 들어야만 했다. 정확히 확인해야만 했다. 그 충동이 내 발걸음과 마음을 굳세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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