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71

by 청화

수진의 생일을 입력하려다가 망설였다. 대신 초인종을 누르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놀란 듯했지만 금세 평온한 표정을 짓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는 말없이 서서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앉아.”


침대에 걸터앉는 그녀, 바라보는 각도마다 변화하는 이목구비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어느 방향으로 보나 수진이었다.


“나는 너 때문에 상처 받았어.” 그녀는 나를 의연하게 바라보았다. “수진이는 상처 주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

“수진이는 그렇지, 나는 아니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하는 거야. 그걸 억지로 막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네가 수진이 아니라, 수빈이라는 거지?”


“그래.”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하나의 질문이 솟았다.


“증명할 수 있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증명? 어떻게 증명해? 아까 주민등록증 보여줬잖아. 어차피 못 믿겠지만. 내가 너한테 뭘 보여줘도 다 못 믿을 거 아니야. 내가 김수진이 아니고 김수빈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네 앞에서 옷이라도 다 벗어서 보여줄까? 그래도 너는 구분 못 해.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거든, 쌍둥이니까.”


나는 그녀의 몸을 투시하듯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다시.” 그녀는 갑자기 밝게 웃었다. “농담이야. 영수 너, 진짜 순진하기는. 나 수진이야, 수진이. 장난 친 거라고.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고서는. 나도 못 알아보겠어? 이거 정말 실망인 걸.”


완전히 수진의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그녀의 격차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금세 그녀의 얼굴이 굳더니 말을 이었다.


“이러면 내가 수진이라고 다시 쉽게 믿겠지. 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말이야. 너는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야. 나는 증명 못해. 내가 수진이 아니라는 것도, 수진의 언니 수빈이라는 것도 못해.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네가 한영수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내가 나라는 것. 한영수가 한영수라는 것. 그토록 자명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네가 누군지, 이제 그건 묻지 않을게. 소용없는 질문이야. 하지만 네가 도대체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아내야겠어. 설령 이게 장난이라 해도 받아들일게. 어디 끝까지 한번 해보자. 네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제부터 내가 상처를 줄지도 몰라.”


“상관없어. 그러면 너는 이제 내 말을 믿기로 했다는 거야?”


“아니,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해. 나는 가정할 거야. 네가 수진이 아니라 수빈이라는 가정.”


“지금 여기서 가정과 믿음이 뭐가 다른데? 그냥 너는 다시 되돌아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거 아니야? 너는 단지 내가 수진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뿐이야.”


“그래 맞아. 너도 그렇잖아. 내가 너를 수진으로 보지 않기를 바라고 있잖아.”


“아니. 나는 그렇지 않아. 네가 나를 누구로 보든 아무 상관없어.”


“진심이야?”


“진실이야.”


“근데 왜 나한테 네가 수진이 아니라는 걸 일부러 말했지? 말하지 않았으면 계속 너를 수진으로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너는 상관없잖아.”


“맞아. 상관없어. 단지, 내게서 수진이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것뿐이야. 지금까지 수진이를 놓지 못하고 있었어. 이제는 떠나보내려는 거야. 그래서 말할 수밖에 없었어.”


“너 뭔가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를?”


“수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냥 내 앞에서 사라지면 되잖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사라지면 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나를 만나서 수진이 아니라고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네가 죽은 수진이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게 네가 수진이를 떠나보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를 포함해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수진이를 떠나보내야 하니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특히 수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채로 남겨두면 안 돼. 그건 수진이를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이 아니야. 그러니까 수진이를 기억하는 너의 존재를 내가 아는 이상, 너에게도 수진이의 죽음을 말해야만 하는 거야. 수진이를 위해서든 너를 위해서든……. 그리고 우리는 완전히 수진이를 떠나보내는 거지.”


“그럼 바로 말했어야지.”


“여태껏 수진이를 떠나보낼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그동안 네가 수진이 행세를 했다는 거야?”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 나도 네 말처럼 사라지려고 했단 말이야. 근데 나는 궁금했어. 수진이가 매일같이 말한 영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근데 너의 눈빛을 보고 단번에 알았어. 네가 수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어. 너에게서 수진이를 바로 죽일 수가 없었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이미 겪었으니까. 그게 너무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를 동정했다는 거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너는 지금 무슨 감정이나 생각이든 간단하게 정리해서 설명하려는 것 같은데, 인간에게 속한 어떤 것이든 그런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내가 너에게 한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야. 설명하려고 시도는 하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


“아니, 있어. 단지 사람들은 회피할 뿐이야. 나도 그동안 그래왔던 거고. 이 문제만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야.”


“네 마음대로 해, 그럼.”


“수진이와 있었던 일들을 네가 어떻게 다 알고 있지? 한 번도 네가 수진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언제나 수진이었어. 나랑 대화할 때 이상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고.”


“네가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래. 나는 수진이와 분명 어딘가 달랐을 거야.”


“그런 적 없어. 언제나, 항상 수진이었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내가 수진이 흉내를 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야.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거든. 그리고 너는 모르겠지만 수진이는 너와 있었던 일을 밤마다 상세히 얘기해줬어. 물론 그걸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 수진이가 죽은 후에 일기장을 봤어. 너와의 일들이 아주 자세히 적혀 있었어. 나는 그걸 기억하는 거야.”


기억.


나는 그녀에게 묻고 또 물었다. 수진과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첫 만남과 눈물, 비 내리는 공원 산책, 놀이동산과 빨간 풍선, 이별, 그리고 재회했던 날에 대해 쉬지 않고 질문했다. 그녀는 모두 기억한다고 대답했다. 그 모든 걸 기억한다면 수진과 그녀가 다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흘러나올수록 오히려 그녀가 수진이 아닌 다른 인간으로 보였다. 사람이 경험한 것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떠올릴 수 있는지 자문했다. 점차 그녀가 수진이 아닌 것 같았다. 의심이 짙어지는 순간, 그녀에게 물어야 하는 시간의 지점들이 수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네가 수진이 아니라면. 언제부터였어? 언제부터 수진이 아니라 너였지?”


“미안해. 그건 정확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 속이 답답하게 끓어올랐다. “내가 그걸 말하면 너는 그 순간을 기준으로 나와 수진이를 구분할 거잖아. 나는 네가 수진이의 모든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 모든 순간은 실제로 수진이었어. 물론 수진이의 죽음과 지금의 나까지……”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알아.”


“처음부터였어? 나를 만난 게 처음부터 너였냐고.”


“말 못한다고 했잖아.”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터져 나온 듯했다. 매캐한 향이 입 안 가득 올랐다.


“너 진짜 미친년이야.”


“알아.”


그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 또한 그녀와 같이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들끓는 속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열기가 입과 코로 단숨에 올랐다.


“부탁이야! 이제 솔직하게 말해줘.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구분할 수가 없다고!”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냉정한 눈빛을 보고 나는 감정의 발산을 후회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학의 명제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여러 방식과 필요한 보조 명제들을 찾고 미리 참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나의 마지막 이성의 작용까지 밀고가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나의 감정을 제해야 했다. 오직 풀어야 할 문제만을 직면해야 했다. 그래야만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하고 마침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분명 나에게 속한 문제이지만 마치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대해야 했다. 제 삼자의 문제처럼. 영수의 문제처럼.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해봐.”


그녀는 서슴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과 다른 부분은 없는지 모든 문장을 판단하고 판정했다.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말했다. 내가 수진과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었던 순간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그녀와 내가 어떻게 몸을 섞었는지, 어디서 사랑을 나누었는지, 어느 부분이 예민하고, 나의 것이 얼마나 크고 단단해지는지, 어떤 자세를 좋아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수진 같지가 않았다. 실은 수진이면서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인간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쓸모가 없었다. 그녀가 수진이든 수빈이든, 내게는 매한가지였다.


있었던 일을 막힘없이 주절대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제 그만. 너는 여기까지야. 네가 수진이든 아니든 이제 중요하지 않아. 네가 언제부터 수진이었고 언제부터 수빈이었는지도 이제 상관없어. 장난이라 해도 이미 선을 넘었으니까. 이제 끝이야. 알았어?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단단히 미쳤거든.”


나는 몸을 일으켜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영수야!” 소름이 돋았다. 절박한 외침에 몸을 돌렸다. “내 곁에 있어 줘. 나를 안아 주란 말이야.”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수진의 것과 똑같이.


“수진인 척 연기하지 마.”


수진의 얼굴을 한 그녀가 울먹이다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낯설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상상 속에서도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울음이었다. 쓸데없이 수진을 처음 만나 흘렸던 나의 눈물까지 기억났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현관문과 탁자 앞을 서성였다. 방 안으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몸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절절한 설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이내 그녀 앞에 우두커니 섰다.


“마지막이야.” 그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턱에서 떨어졌다. “너는 누구야?”


그녀의 눈물이 멎었다. 그녀는 침묵했다. 정적이 흘렀다. 아주 무겁고 깊은 정적이었다.


“나는 수진이 아니고 수빈이야. 하지만 널 사랑해.”


어이가 없었다. 복수하듯 말했다. “네가 누구든 이제 다 끝났어.”


“영수야! 제발 나를 떠나지 마. 부탁이야.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아니면 나는 수진이를 떠올릴 수조차 없어. 그 자체가 내게 죄야. 나도 왜 이렇게까지 한 지 알 수 없어. 충동적인 일이었어.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수진이를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수진이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 했어. 그게 내게 중요했어. 그래서 너를 만난 거야. 너는 수진이를 사랑하지? 나도 수진이를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나도 수진이를 추억하고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 근데 내게는 그런 곳이 없었어. 지금 네가 떠나면, 나는 홀로 수진이와 남게 돼. 어떤 누구와도 수진이를 말할 수 없는 거야. 응? 제발 영수야. 나를 버리고 가지마. 수진이를 버리고 가지마. 부탁이야.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 너밖에 없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살갗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했다. 수진도 아니었고, 수진을 흉내 냈던 그 누군가도 아니었고, 제정신이 아닌 수빈도 아니었다.


“이제 그만해. 나한테 이러지 말고 누구에게든 돌아가.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가 동생이랑 똑같이 생겼다는 거. 그게 나한테 그대로 죄야. 무슨 말인지 알아? 내 존재 자체가 죄라는 말이야. 부모님은 아무리 동생을 잊어보려고 해도 나를 보면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단 말이야. 너 그게 무슨 느낌인지 모를 거야. 부모님이 나를 보는 눈빛 말이야. 심지어 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게 얼마나 괴로운 줄 아냐고. 근데 정말 힘든 건, 나 자신이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수진이가 떠올라. 아니, 수진이가 살아 숨 쉬고 있어. 나도 벗어나고 싶어. 정말 미치겠어. 하지만 어느 누구와도 수진이를 말할 수 없는 거야. 부모에게도 내 모습을 보이지 못해. 수진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록 수진이는 내 안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있어. 살아 움직인다고. 너는 그런 삶을 상상이나 해봤어? 너는 그걸 혼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절규 섞인 토로를 듣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수진이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유일해. 그런 너를 내가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생각하는 거야? 수진이를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너나, 수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너나, 내게는 다 필요해. 제발 영수야. 내 곁에 있어 줘."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부탁이야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랑 같이 있어줘. 응? 꼭 여기를 다시 찾아와줘. 부탁이야. 날 용서해달라는 말은 안 해. 하지만 나를 찾아와줘. 나를 좀 도와달란 말이야. 이렇게 나를 두면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나와 함께 수진이를 온전히 기억하고, 그 후에 함께 잊어줘. 모두 끄집어 낸 후에, 그 후에 지워도 늦지 않아. 그때까지 나도 너를 도울게. 부탁이야. 나는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어. 사람 한 명 살린다고 생각하고 나를 버리지 말아줘. 제발. 나는 영수 네가 필요해. 나 혼자서는 이걸 감당할 수 없단 말이야!”


그녀는 소리치고 하늘을 보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하늘에게 하소연하는 모습이었다.


그 울음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게 목이 메었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문을 박차고 나왔다. 느닷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게 우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걸었다. 비를 맞았다. 젖었다. 걸었다. 빗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수진이 어디까지 실제 수진이고, 어디서부터 수진이 아닐까. 과연 그 지점을 단순히 둘로 나눌 수가 있기나 할까. 내게 그럴 능력이 있기나 할까. 결국 나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다. 실패했다. 참도 거짓도 취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이름을 지을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는 가능성으로 남았다. 내게서 떠난 것도 내게 머무는 것도 아니었고, 수진도 수빈도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과 말들이 혼재되어 모호하게 떠다녔다. 동심원의 물결이 일어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비틀었다. 대신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장대비가 내렸고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했다. 수진과 비를 피했던 그때와 똑같았다. 공원 외딴 어딘가에서 수진이 비를 피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빗속에서 수진을 찾아 헤맸다. 누군가 우산을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진. 사랑에 빠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진. 하지만 내게는 우산이 없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수진을 찾아야만 했다. 다시 한 번 수진과 손을 잡고 빗속을 달리고 싶었다.


공원 안에서는 수진의 기억이 생생했다. 나는 수진을 회수하려는 사람처럼 공원을 쏘다녔다. 동물의 우리와 상점, 놀이터와 잔디밭, 벤치와 작은 놀이기구 옆을 지났다. 때마다 수진을 기억했다. 그녀는 나의 손등에 길게 난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나조차도 몰랐던 상처를 찾아주기도 했다.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본다고 했다. 상처를 대신 찾아준다고 했다. 상처. 공원 곳곳에서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온몸 구석구석이 아파왔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방금 상처를 받았다. 속이 따끔거리다가 들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수진이 내게 상처를 준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수진이 분명 말했었다. 우리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도 도저히 상처를 낼 수 없는 우리라고. 그런데 어떻게 나는 상처를 받았을까. 그녀는 어떻게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을까. 그녀와 함께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빗방울의 촉감이 두피와 어깨에 느껴졌다. 나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 비는 나를 계속해서 깨웠다.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나를 건드렸다. 수진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로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세차게 내렸다. 함께 비를 피하던 그는 수진이었을까.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에 갇힌 것 같았다. 바닥만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길바닥에 깨져 흩어졌다. 나는 아주 큰 상처를 실감했다. 아팠다. 아팠지만 갈 곳이 없었다. 나의 집도, 나의 방도, 도서관도 아니었다. 오직 수진뿐이었다. 상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곳. 오히려 상처를 보일 수 있는 곳. 수진의 곁뿐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빗물이 기억 속의 모든 색을 풀어 새까맣게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비를 맞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는 내게 빨간색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비를 막아 주었다.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빗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울었다. 내게 돌아갈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나 상처를 받았다. 상처투성이었다. 자문했다. 그녀 때문인가? 다른 누구 때문인가? 나의 오래된 질문이 솟았다. 그랬다. 내가 아직도 유약한 탓이었다. 단단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 내 탓이었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 걸까. 하지만 내가 얼마나 더……


비가 떨어졌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흐물거리고 축축한 나의 몸을 안았다. 나는 그녀의 몸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유유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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