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_잇다> 첫 번째 이야기
천년 고도 경주. 경주는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역사와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석굴암, 불국사, 동궁과 월지 그리고 황리단길까지, 그러나 핵발전소가 경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월성 핵발전소 4기와 신월성 핵발전소 2기,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과 사용후핵연료 조밀 건식 저장시설인 맥스터, 한국 원자력환경공단, 양성자가속기연구센터와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까지. 핵발전소 관련 거의 모든 시설이 경주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핵발전 시설은 토함산에 의해 천년 고도 경주를 즐길 수 있는 경주 시내와 생활권이 분리된 동경주(양남면, 문무대왕면, 감포읍)에 몰려 있어,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월성 핵발전소가 있는 양남면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홍보관과 월성 스포츠센터, ‘원전 수용성 전화 설문조사 안내’, ‘원전 현장 인력양성원 교육 훈련생 모집’, ‘월성 청소년 합창단 모집’이 적힌 현수막들 그리고 ‘이주’를 요구하는 주민들이 만든 농성장은 원자력발전소 홍보관 앞에 있다. 그리고 핵발전소로 더 다가가면, 곳곳에 ‘제한구역 알림: 본 지역은 원자력안전법 제89조에 따라 제한구역(EAB)으로 설정된 지역으로 일반인 출입 및 거주를 통제하는 지역입니다’라는 팻말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월성핵발전소 원자로 반경 914m에 해당하며, 원자력안전법에 따르면 “방사선관리구역 및 보전구역의 주변구역으로 피폭방사선량이 위원회가 정하는 값을 초과할 우려가 있는 장소”를 일컫는다.
‘핵발전’ 시설들과 핵발전소에서 반경 914m밖에 떨어지지 않아 일반인의 출입 및 거주를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제한구역(EAB)’은 천년의 고도 경주시와 좀처럼 어울리지도,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경주 시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난 30여 년간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있다.
핵발전소의 관점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다.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탈원전’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던 문재인 전 정부에서 ‘탈탈원전’을 선언하고 ‘원전 최강국’을 다시 만들겠다는 윤석열 정부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여름과 겨울의 극심한 날씨 변화와 ‘삼한사온’을 일상으로 겪어왔던 대한민국조차,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폭염, 폭우와 폭설 등을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후변화 앞에서 핵발전소 이슈는 오래되고 해묵은 문제로 취급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사람 중에서도 ‘핵발전소’가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과 전국에서 핵발전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과 활동을 들었다. 옅어지고 퇴색해버리려는 ‘탈핵’의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잇고,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 속 위험과 불안 등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로 경주 월성 핵발전소 최인접마을인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사는 황분희를 2023년 1월 27일 오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동이 고향이고 결혼한 이후에는 오랫동안 남편의 직장을 따라 울산에서 살았던 황분희는 남편의 좋지 않았던 건강 때문에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서 3년 정도 쉬고,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울산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황분희는 10분 거리에 아름다운 해당화가 핀 나아 해변이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좁은 길목에 소나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조그맣게 농사지으며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건강이 차츰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먹을 건강한 과일, 채소들을 조금씩 키우기 시작했고, 현재는 과일나무들을 포함해 스무 가지가 넘는다.
우리 아저씨가 현대중공업에 다녔거든. 그때는 정말 회사에서 종일 살았어. 새벽 깜깜할 때 집을 나갔다가 한밤중에 들어왔거든. 우리 아저씨가 총반장이라고 반장 중에서도 제일 높았어. 철판으로 배를 만들려면 재단을, 도면을 떠야 하는데. 그걸 잘 못 하면 엄청난 손해가 나잖아. 아저씨 성격이 굉장히 꼼꼼하거든. 정확하게, 오차도 없이 만들었어. 근데 그렇게 일하니 스트레스를 받는 거야.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 무슨 특별한 병이 있는 게 아니라. 게다가 총반장이니까, 자기 밑에 있는 직원들한테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데, 그런 걸 못 하니까. 보너스를 나눠주어도, 왜 누군 얼만데 나는 이것 밖에 안주냐고 집 앞까지 와서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혼자 끙끙 앓았던 거지. 살이 빠지고 마르기 시작하는데, 음식도 제대로 못 먹으니 면역력이 약해져서 식중독 같은 것도 오고. 병원에 가니까 절대로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딱 말하더라고. 그래서 여기 경주로 오게 됐지.
황분희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체르노빌 사고가 났었던 1986년으로, 37년째 이곳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 황분희의 이야기를 듣다가 “혹시, 이사 올 때, 핵발전소가 있다는 걸 모르셨어요?”라는 질문을 하기가 주저되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마치, 이곳을, 핵발전소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사 온 당신 탓처럼 들릴까 봐, 주저하며 던진 질문에 황분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몰랐지, 몰랐어. 이사 올 때 누구도 마을 1km 바로 바깥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어. 지금은 마을에서도 핵발전소가 잘 보이는데, 당시에는 왜 안 보였나 모르겠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근데, 알았다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거야. 왜 그런지 알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30년 전에는 국가나 티비에서, 학교에서 원전은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라고만 말했잖아. 그냥 믿었겠지, 믿었을 거야.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이 좋아서, 들어왔고 지금까지 살고 있지.
황분희는, 이 작은 마을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것을, 그 핵발전소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바보처럼 모르고 살았어.”를 인터뷰하는 중간에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래도 마을살이는 좋았다. “이웃사촌이라고 멀리 사는 가족, 자식이 무슨 소용이야. 바로 앞집, 뒷집에 사는 이웃, 친구들이랑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수다도 떨고. 내가 된장국 하면 와서 먹으라고 하고, 저기서 시락국 하면 나도 가서 얻어먹고 했지. 바깥에서 만나면 반갑고 너무 좋아서, 길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 떨고.” 그렇게 이웃사촌인, 마을주민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던 이곳에, 큰딸 내외에게 같이 살자고, 손주들도 돌봐주겠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우리 세대만 해도 아들을 엄청 좋아했잖아. 근데, 내가 딸만 셋을 놓고 더는 아들 낳으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니까, 아저씨가 괜찮대. 딸만 키워도 괜찮다, 이래 가지고 딸만 키웠는데. 그 손자를 놓으니까 그렇게 좋더라고. 그래서 딸이 울산 시내에 살았는데, 어린이집 보내면 어린이집에서 애들 학대하고 그런 것도 있었잖아. 내가 손녀랑 손자 키워 줄 테니 들어와서 살아라, 먼저 말했지. 할머니 밑에서 크면 애들 인성도 좋고. 너희는 걱정말고 일해라, 내가 애들 봐줄 거라고 했지.
하나의 사고가 그들의 일상과 행복이 실은 불안과 위험과 멀지 않음을, 그동안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과 정부가 공고하게 쌓아왔던 핵발전소 ‘안전 신화’를 조금씩 깨트리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황분희는 “한수원은 깨끗하고, 안전하다 늘 말해왔거든. 우리는 그걸 믿고 살아왔지. 근데 티비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해일이 치는 걸 보는데, 뭘 처음 느꼈냐면.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한순간에 핵발전소가 위험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여기 사는 우리가 사실 한수원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잖아. 왜냐하면, 한수원에서는 항상 원전은 깨끗하고 좋은 에너지라고 말하고. 환경단체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삼중수소가 냄새도 안 나고, 색도 없고. 보통 환경오염이랑은 다르잖아. 깨끗하고 안전하다길래 평생을 믿고 산 거야.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텔레비전에선 연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영상을 틀어주었고, 당시에 기자들도 마을에 방문해서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등 국내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끝내고 한 기자가 황분희에게 지금까지 한수원이 들려주지 않았던, 혹은 들어왔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한수원은 지금까지 중수로가 경수로랑 다른 점이 없다고 했거든? 방사성 물질도 전혀 안 나오고.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한 기자가 인터뷰마치고 나한테, “중수로는 경수로와는 다르게 더 무거운 물인 중수(重水)를 냉각재로 써서 여기 월성원전은 다르다”고 말한 거야. 게다가, “후쿠시마처럼 끔찍한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액체나 기체로 방사성 물질이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계속 나온다”고 말해주더라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왜 이렇게 모르고 살았나, 속고 살았나 싶더라고.
이처럼 후쿠시마 사고는, 사고 그 자체로도 한수원이 만들어 놓았던 ‘안전 신화’를 의심하게 했지만, 우연한 기회로 만난 기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해 ‘안전 신화’가 실은 거짓말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황분희는 처음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인 2012년과 2013년에 핵발전소의 안전한 운영과 관리를 담보해야 하는 한수원 내부에서 ‘원전 부품 비리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분희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알게 된 전문가들, 그중에서도 김익중 교수에게 삼중수소 문제나 여기에서 사는 게 안전한지 등을 물어보기도 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안전하다고만 했던 것들에 대해서.
내가 김익중 교수님을 찾아가서, 아니 이게 안전한 거냐, 문제는 없는 거냐고,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삼중수소라는 방사성 물질이 월성 핵발전소에서 나오는데. 문제는 그게 액체나 기체 상태로 계속 배출되니, 우리가 마시는 지하수나 먹는 농수산물에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고 물으니, 없대. 물을 끓여도 삼중수소가 안 없어지고, 정수기를 설치해도 안 된대. 그냥 생수를 사 먹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가족이 전체 여섯 명인데, 한 두 달간은 정말 걱정이 되어서 생수를 슈퍼에서 사 먹었거든? 근데, 이게 감당이 안 되는 거야. 뭘 어쩌겠어, 다시 먹던 물을 마셨지. 여기서 나는 농수산물을 안 먹으면, 또 어떻게 살겠어. 그냥 먹었지, 그냥 그렇게 했지. 걱정이 되도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혼자서 고민하던 황분희는 후쿠시마 사고와 연이어 터진 부품 비리 사건들 이후 마을에서 더는 한수원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이주대책위(월성원전인접지역 주민이주대책위원회)를 2014년 8월 24일에 만들었다. 공고하게 보였던 핵발전소의 ‘안전 신화’에 주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제기하고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에 만들어진 이주대책위는 현재까지 9년을 쉬지 않고 한수원과 정부에 이주를 요구하고 있는데, 매주 월요일 오전 8시 20분 월성 핵발전소 남문으로 이어진 도로에서 상여와 관을 끌며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나아리 주민들과 경주시민, 울산 시민 등 열 명 내외가 모여 끄는 상여와 관 위에는, 주민들의 직함도 적혀 있다. 황분희는 “핵발전소 아주 가까이에 사는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르지 않아 관에 우리들의 직함을 적었다. 매주 월요일, 우리의 직함이 적힌 관과 상여를 끄는 것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상복을 입고, 상여곡을 틀기도 했었다. 핵발전소 근처에서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자신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과 동시에, 위험한 핵발전소를 이제는 멈추라며 발전소에 대한 장례식, 즉 자신과 핵발전소의 장례식을 매주 치르고 있었다.
실제 관 위에는 ‘處士 局長 之 柩(처사 국장 지 구: 사무국장의 관)’이라고 적혀 있다. 황분희는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2012년에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고, 황분희의 남편도 갑상샘항진증을 앓고 있다. 과학적으로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과 방사성 물질 사이의 인과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자기 몸에 새겨진 암이 자신이 싸워야 할 충분한 근거이자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아니, 과학적으로 전문가들은 항상 기준치 이하라서 괜찮다고 말하거나, 바나나 몇 개, 멸치 몇 그램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거든. 안전하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오히려 물어보고 싶어. 이 마을에 암으로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수십 명이고, 예전에는 특히 국민학생, 중학생 또래 애들 세 명이 백혈병으로 죽었거든. 물론, 그들 부모가 쉬쉬하거나 이 마을을 떠나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상하잖아. 이상한 일들 투성인데, 그냥 계속해서 괜찮다고만 하니까, 이제는 못 믿는 거지. 전문가란 사람들도 한수원이랑 한 패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고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내 자식들, 손주들이지. 그래서 매주 힘들더라도 싸우는 거야.
이주대책위가 처음 만들어진 2014년에는 월성 핵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아리와 나산리 주민 72가구, 약 150여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한수원에 이주를 요구하는 것, 매주 상여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주민 대다수가 한수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월성 핵발전소나 하청·재하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의 자녀가 일하거나, 월성 핵발전소 정문 근처에서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누구하나 한수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주민 중 일부는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라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수년째 요구해 왔다. 시간이 갈수록 상여시위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는데, 한수원이 노골적으로 압박하지 않더라도, 그들 스스로가 생계 때문에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에도 열심히 상여시위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자신의 딸이 운영하는 가게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주대책위에게 함께 싸우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에 상여시위에 나와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그 이후론 못 나오겠지, 딸내미 때문에. 피자집인가 통닭집인가를 하거든. 딸내미가 먹고살려고 다시 고향에 들어와 가게를 차렸거든. 근데, 엄마가 계속 우리 집회장에 나오니까, (한수원이) 못 나오게 하는 거야, 장사를. 직원들을 거기에 못 가게하고, 그래서 할머니가 하는 말이 “자식이 먹고살려고 왔는데, 자기가 여기 집회에 나오니까, 한수원이 배달을 딱 끊어버렸다는 거야”
이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 집회에 나간 가게의 주인이 한수원 인트라넷 ‘나쁜 가게’ 리스트에 올라 매출이 떨어지거나, 점심에 도시락을 주문받아 다 준비했는데 갑자기 취소시키는 등 한수원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가게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나는 사실 (도시락 시켰다가 취소했다는) 식당이 좀 과장되게 말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 할머니가 직접 겪고 여기 와서 말을 하니까 이게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다시 느낀 거지. 할머니가 우리한테 “못 나가서 미안하다”라고 하는데, 내가, “괜찮다, 못 나와도 괜찮다. 아니, 자식이 먹고살려고 다시 고향에 왔는데, 살아야죠. 그러니까 안나와도 괜찮습니다”라고 했지.
이렇게 150여 명으로 시작한 이주대책위는 다양한 이유로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9년이 지난 지금은 적을 때는 열 명이 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황분희는 그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함께 싸워온 사람들이 그만둘 때마다 아쉽기도 하고, 계속 같이 싸웠으면 좋겠지만, 이해돼. 맥스터 때, 식당 주인들도 많이 참여한 적도 있거든. 근데 같이 싸우고 싶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집회장에 한 번 나오면 도시락 주문 다 끊기고, 피해를 보니까. 이 마을은 딴 데 보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한수원 하나’ 보고 장사를 하잖아. 외부에서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거든. 치사하게 그런 걸 가지고 회유든 협박을 하는 거지. 자기네들이 잘해서, 동네, 지역주민과 더불어 살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먹고사는 일 갖고 동네 사람을 갈라놓는 거지. 한수원이 입에 달고사는 진짜 ‘상생’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나쁜가게 리스트를 만들지 않나. 주민들이 이젠 아는 거지. 내가 저기(이주대책위)에 나가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걸.
나아가 황분희는 한수원이 강조하는 ‘마을 발전’이나 ‘지역 상생’이 ‘안전 신화’처럼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살기 좋고 인심 좋은 동네였는데, 한수원이 들어와서 그냥 버려놓은 거지. 하나라도 같이 나눠 먹고 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적군 아니면 아군. 아니면 모든 걸 ‘이해관계’로만 나한테 득이 되고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이 행동하게 만든 거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한수원에 아부하고, 잘 보이려 하고, 정작 한수원은 안전이나 이주, 건강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그동안 핵발전소 인접 마을에 사는 주민에 관한 연구, 기사, 보고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보통은 주민들이 어떻게 싸우고 투쟁해왔는지, 즉 ‘싸우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에 주목하여 가장 극적인 장면과 모습들만이 알려져 왔다. 연구하고 글을 쓰는 나도 ‘싸우는 황분희’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이주대책위 부위원장으로서 기자회견에 가고, 상여시위에 참여하고, 마이크를 잡고 핵발전소 문제를 비판하고 이주를 요구하는 황분희, 그러나, 일상에서 황분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주대책위 부위원장이 아니라, (소)농부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황분희로서 그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그의 일상에서 핵발전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어쩌면, 이 인터뷰를 하게 된 이유, 황분희에게 가장 듣고 싶고, 보고 싶었던 것이 그의 일상과 핵발전소가 어떻게 교차하는지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핵발전소에 인접한 마을에 사는 주민이 아니기에, 그들이 평소에 느끼는 것들, 일상 속 핵발전소에 대해 경험할 기회가 없으니까.
가족들은 그가 하는 다양한 활동, 시위를 잘 알고 있을까? 민감할 수도 있지만, 가족들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알지, 대충은 알지. 가끔 서울로 기자회견 하러 가면, 손녀가 응원한다고 말해주기도 해.”라고 말했다. 이어 황분희는 신이 나 다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년에, 유학 중인 손자가 나한테 연락을 한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돼서 물어봤더니, 자기가 수업 시간에 가족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자기 할머니는 인터뷰에 검색하면 나온다고, 가족을 위해 힘들게 싸우고 있는 할머니가 자랑스럽다고, 수업에서 발표를 했대.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나아리에서 태어나서 함께 살았던 손주(현재 초등학교 6)가 다섯 살일 때, 추적 60분을 비롯한 많은 조사에서 손주의 몸에서 성인에 필적하는 삼중수소가 발견되었다. 가족들과는 활동만이 아니라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에 대해 얘기 잘 안 해, 못 하지. 아저씨랑은 하는데, 자식들한테 안 하지, 얘기할 때도 조심스럽게 애들(손주)한테는 더 못 하고. 지금 둘이 벌써 고3이랑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가거든. 그때, 삼중수소가 몸 안에 있다는 조사할 때가, 다섯 살 때였으니. 이런 이야기를 사실 애들한테 할 수가 없어. 우리만 스트레스받는 건 괜찮은데, 애들이 만약 수업에서 ‘방사능이 위험하다’라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 몸에 삼중수소가 성인보다 높게 있었는데.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어. 그러면, 우리는 왜 방사능을 맞고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할거고. 애들한테는 방사능 얘기, 위험하다는 얘기, 원전 얘기를 못 하고, 심지어는 너희들 몸속에 방사능이 있다는 얘기는 아예 하질 못하지. 진짜 못 해, 할 수가 없어. 그 얘기를 하려고 하면, 내 가슴이 더 미어지고 찢어지는데, 너무 미안하고.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
황분희는 지금도 자녀와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애들한테 여기에 와서 같이 살자는 말만 안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항상 미안하지”
여기선 애들이 울산까지 출퇴근하는 게 20~30분밖에 안 걸리거든. 그래서 애들이 나를 믿고 들어와서 산 거지. 당시에 손녀는 여섯 살이었고, 손자는 여기서 임신해 갖고 낳은 거고. 근데, 한 가지 후회스러운 것은 그때 내가 애를 봐준다고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늘 미안하고 죄스럽지. 사실 후쿠시마 사고 날 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게. 그 불안한 게 딱 적중을 한 거야. 2015년에 추적 60분이 삼중수소 검사를 했거든? 그 결과를 받는데 희망이 무너지더라고.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 그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처음에는 진짜. 머리가 뭐 돌로 진짜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 애들한테 너무 미안하지. 나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이렇게 애들이 피해를 보지도 않을 텐데. 늘 불안한 생각은 갖고 있지. 그냥 놀다가 피도 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잖아. 근데 나는 계속 걱정이 드는거지, 왜 저렇게 코피가 나지...
2015년에 추적 60분에서 나아리 주민 40명의 소변을 모아 삼중수소 농도를 검사하였는데, 삼대가 함께 사는 황분희 가족 모두가 참여하였다. 검사 결과 40명 모두에게 삼중수소가 검출되었는데,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던 황분희는 28.1 Bq/L, 갑상샘항진증을 앓고 있는 남편은 24.8 Bq/L이 나왔고, 당시 다섯 살 손자에게서도 17.5 Bq/L로 40명 평균인 17.3 Bq/L 보다 높은 수치가 검출되었다. 핵발전소에서 사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과 걱정이 구체적인 숫자로 드러나자, 황분희는 이주를 요구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에게는 ‘절망’과 ‘죄책감’이 교차한 순간이기도 했다. 즉, 삼중수소 검사는 일상 속 눈에 보이지 않던 위험물질을 명료하게 인식하여 핵발전소로 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위험한 곳에서 함께 살자고 권유했던 자신이 가족들을 위험에 빠트린 ‘가해자’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위험 속에 사람들을 방치한 가해자는 따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황분희는 가족이 위험 속에서 살아가며, 그들의 몸에 삼중수소가 검출된 것 자체를 마치 자기의 탓인 것처럼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방학인 요즘, 손자들이 할머니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전화를 하거든. 근데 내가 어떻게 마음 편하게 “그래, 와서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닷가에 놀러 가고 며칠 푹 자다가”라고 말하겠어. 또 반대로 “얘들아, 여기는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니까, 놀러 오지 마”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그러면 애들은, ‘할머니가 우리를 싫어 하나? 왜 오지 말라고 하시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니까. 참, 항상 고민되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황분희나 다른 주민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나 역시 문득 그런 고민을 했다. ‘주민들이 해주신 음식을, 직접 기른 블루베리로 만들어준 차를, 먹어도 될까? 별문제는 없을까?’ 그들의 환대를 진심으로 즐기기보다는, 나도 모르는 찰나에 이런 걱정을 했다. 그러다 비로소 ‘황분희들’이 평생을, 수도 없이, 일상 속에서, 누구도 확신해줄 수 없는 ‘안전과 위험 사이’를 오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 삼중수소 검사 결과를 확인했을 때, 방사성물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황분희는 무엇을 느꼈을까.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외에도,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을까?
당연히 무서웠지. 처음에 방사능이 나온다고 했을 때는, 정말 걱정이 많았지. 이걸 먹어야 하나, 안 먹어야 하나, 판단이 안 섰지. 근데 벌써 10년이 지나다 보니 무뎌지기도 하고, 사실 우리도 직접 농사해서 먹고 가꾸고 우리도 살아야 하잖아. 무뎌지더라고. 지금도 좋지는 않다고 보지. 근데 애들은 아무 생각 없이 먹으니까, 거기다가 ‘안 좋으니까, 위험하니까, 먹지 마, 조심해 이럴 수도 없잖아’ 그럼, 나는 위로를 하는 거지. 그래 몸에 들어가도 반감기가 있다고 하니까. 몸 밖으로 배출된다고 하니까, 스스로 위로를 하는 거지.
나를 위해, 가족에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농사를 짓고, 음식을 하고, 그러나 그 농수산물과 음식이, 실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매일, 매 순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황분희가 말한 “이제는 처음보다 무뎌졌지, 그렇게 위로를 하는 거지”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황분희는, 핵발전소 최인접지역에 사는 ‘황분희들’은, 한수원의 ‘핵발전소 안전 신화’와는 다른, ‘안전해야 해, 안전할 거야’라는 위로와 주문을 매일 자신에게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위로와 주문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황분희는 그렇게, 누구에게도, 가족들에게조차 일상에서 느끼는 걱정과 불안, 안타까움과 미안한 감정 모두를 보여주지 못한 채, 혼자 주문을 걸고 있었다, ‘안전해야 해, 괜찮을 거야’.
글을 쓰고 있는 현재(2월 18일)를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상여시위는 2023년 2월 13일이었다. 황분희를 포함한 이주대책위는 3,095일째 싸우고 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 ‘황분희’를 검색하면 많은 기사와 영상들이 나온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안전하고 행복한 하루’를 싸워서 쟁취하기 위해 안 가 본 곳 없고, 안 해 본 것 없고, 안 만나 본 사람이 없는 황분희는 지난 몇 년간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황분희에게 연대자, 활동가, 연구자, 기자 등 월성에 관심 갖고 방문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늘 만나는 사람들한테는 고맙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니까. 우리를 안타까워하고, 위로하고. 참 좋아. 근데 또 반대로 생각하면, 서울이든, 경주든, 부산이든 탈핵 행사가 있는 곳에 가면 항상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 이미 우리 문제를 잘 알고, 나를 잘 아는 사람만 만나니까, 우리 싸움이 확장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여기 농성장에 오면 나는 또 열심히 내가 아는 것들, 경험한 것들을 설명하거든. 한 번은, 20명 정도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왔거든. 근데 남자분 한 분이 먼저 “죄송하다”라는 말을 해야겠대. 자기가 예전에 한 번 이곳에 왔는데, 그때는 원전도 모르고, 자기 생각에는 내가 너무 비판적으로, 편향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대. ‘저거 다 거짓말이야, 저 말이 사실이면,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하고 집에 갔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집에 가서 원전에 대해 찾아보고, 공부하고 기사를 검색하는데, 다 맞다는 거야. 그때 다시 와서는 죄송하다고 말을 해야겠대, 자기가 너무 몰랐고 관심을 못 가져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게 우리나라 원전의 특징이라고. 웬만해서는 사고가 나고, 방사능 유출이 나도 뉴스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