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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Mar 31. 2016

#4 - 너와 나의 세상

끝내 모자를 벗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발목을 덮는 치마를 입고 왔다. 가끔씩 살짝 보이는 발목은 부러질 듯 얇았다. 얼굴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코끝까지 눌러쓴 모자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유일하게 우리 카페에 천막이 쳐있는 자리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올 때 항상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마치 그녀의 분신이 먼저 자리를 확인해주고 승인이 되면 들어가는 것처럼.

어떨 때는 젊은 남성이 뒤따라 들어오기도 했지만, 혼자 올 때가 더 많았다. 혼자 올 때면 어김없이 작은 에코백에서 대본을 한 아름 꺼냈다. 처음엔 텔레비전 안에서만 보던 대본들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몇 시간 동안 그것들에 집중했지만, 아무 시선이 없어도 그녀는 끝내 모자를 벗지 않았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는 부유층들이 거주하는 동네의 거리에 있다.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름의 전통 카페를 자부하던 사장은 고객이 직접 와서 주문하기 보다 종업원이 직접 가서 주문을 받고, 또 음료를 가져다 주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녀에게도 동일하게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고, 잠시후에 주문을 요구했다. 주로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셨고, 간혹 라떼를 주문했다. 어쩌다 사장님이 서비스로 빵 류를 주어도 동행인은 남김없이 먹었지만, 그녀는 한 입 정도 먹을 뿐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 칼로리 때문인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엄마와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막장 스토리가 가득한 일일 드라마였다.

‘아… 활동을 하고 있었구나.’

그녀였다. 주문할 때 외에는 작은 소리도 내지 않던 그녀의 연기를 보니 은근히 반가웠다. 가족들에게 내가 일하는 카페에 들르곤 한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예뻐? 어떻게 생겼어? 그냥 항상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답하기가 여간 간단하고 편했다.

30분 남짓 되는 방영시간에 그마저도 몇 컷 나오지 않았다. 벌써 17년 전쯤 당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악역인 주연으로 열연을 했던 그녀는 여전히 연기력이 뛰어났다. 내 기억에 그녀는 아무 구설수에도 오른 적이 없다. 흔한 스캔들, 소속사와의 분쟁 등 뉴스 연예란에서 이름을 본 적이없는 것 같았다. 외모, 연기, 사생활도 흠 잡을 게 없는데 왜 저런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러다 이내 엄마가 깎아주는 사과에 정신이 팔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학교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와 가까운 위치의 회사에서 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하는 정시퇴근이라고 했는데 특별하게 만날 사람이있는 건 아닌가 보다. 퇴근 후에 무엇을 먹을지 블로그를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온통 광고글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다.

몇 년 전 날 찾아와 한참을 울던 그녀였다. 2년 동안 인턴을 했고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었다. 일이 고되긴 했어도 회사도 가깝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 정규직 전환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바로 위에 맞선임이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고 종종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친절하게 일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굉장히 드문 일이다- 정규직 전환은 걱정 말라며 불안해하던 그녀를 안심시켜 줬다고 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녀는 정규직 전환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맞선임의 평가 점수 미달이었다.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팀장에게 그녀의 단점을 보고해왔고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 또한 가로채기 일쑤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을 제외한 다른 인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총을 쥐지 않고도 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경력을 살려 금방 재취업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공과 사의 공간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우리는 한 수 배웠다고 생각하라고 했고, 실제로도 그녀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상대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회 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 된지는 오래다. 나도 학창시절 인턴을 하며 그것부터 하드 트레이닝 되었다. 처음엔 섬뜩했지만 차갑게 배웠고, 기호에 맞추어 몸에 스며들게 했다.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을 만큼 아주 유용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렸을 그녀를 한없이 반겨 주어야겠다.




“야 그 기사 봤어?”

연예인 이야기일 테다. 2개월 먼저 들어온 바리스타 언니는 연예인에 특히 관심이 많다. 아마 종종 들르는 연예인이 몇 명 정도 있고, 꽤나 이름있는 기획사 사장들도 가끔 차를 마시고 가는 이 카페는 언니가 흥미를 느끼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 분명하다. 언니가 만드는 커피 맛이 굳이 찾아 올 정도는 아니라, 역시 장사는 목이 중요하다는 걸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본 기사는 스캔들이었다. 재벌2세와 연예인이 교제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짝이 없는 남녀가 연애를 하는 이야기에도 찬반이 나뉜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시급 때문에 5분 지각에도 예민한 건 우린데 그들을 걱정하고 있자니 시간이 아까워 청소를 핑계로 잠깐 밖으로 나왔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그들의 스캔들 기사를 눌러보았다.

‘왜 우리가게에 검은 옷에 항상 모자 쓰고 오는 그 여자 같던데’

가녀린 얼굴에 큰 모자를 뒤집어 쓴 게 카페에 올 때와 비슷한 모습이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웃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분명 기사에는 연인이라고 써있는데 역시 아무표정이 없다.

기사 내용은 자극적이고 흥미롭기에 충분했다. 직접적인 단어만 없을뿐 그녀는 거의 발가벗겨져 있었다. 그녀는 스캔들로 마음 졸이고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제야 그녀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가십 거리를 제공하는 것 또한 그들의 역할이라 생각했고, 무관심 보다 어떤 종류의 관심이라도 얻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며칠뒤 그녀는 어느 드라마의 주연을 맡게 되었다고 바리스타 언니가 말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연말연시가 되면 각자 좋아하는 간식을 앞에 두고 시상식을 챙겨보는 소소한 재미를 누린다. 나는 관심이 없어진 지 오래지만 엄마는 여전히 대상 수상자를 점찍어보며 요새 재미들린 핸드폰 게임을 한다.

와- 뉘 집 자식인지 다들 예쁘고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작은 얼굴에 굵직한 이목구비, 큰 키에 군살 없는 몸매는 우리나라에선 어려운 조합인데 요즘은 참 많기도 하다. 게다가 성격도 좋고 유명 외국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이 줄줄이 연예인을 한다며 데뷔를 하고 있다. 운만 조금 따라주면 나이가 어리건 성별이 불분명하건 노른자땅에 본인명의의 건물 몇 채가 생기는데 용기가 있다면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직업이다. 이상하게도, 내 부모님은 바리깡을 들고 말리는 직업이지만.


“쟤 네가 아르바이트했던 카페에 오던 애라고 하지 않았어?”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가 맞다. 항상 기다란 옷을 덮고 다니던 그녀가 잔뜩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으니 다르게 보였다. 저렇게 되려면 공짜로 주는 빵을 한 입만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거구나. 실물로 본 부러질 듯 얇은 팔목이 텔레비전에서는 보통처럼 보인다. 남동생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술 뜨며 관리 안하는 여배우들은 질색이라고 두어 마디 악담을 뱉는다. 왠지 반박하고싶었지만 그만 둔다.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로 퍽 좋은 상을 받는 것 같다. 동료들이 올라와 색색의 꽃을 안겨준다. 긴 무명생활로 겸손해 보이는 말투와 소탈해 보이는 행동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문득, 항상 카페에 외제차를 타고 와서 에코백에서 대본을 꺼내던 그녀가 생각 났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채널을 돌렸다.




오랜만에 핸드폰이 울린다. 오늘도 야근을 한 남자친구가 이제야 시간이 났다며 하소연과 해명을 동시에 늘어놓는다. 많이 바빴던 모양이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다음달에 함께 가기로 한 여행을 할부로 결제한걸 보아 한동안은 조용할 듯 하다. 두 세 배가 뛰는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성수기에 갈 수 밖에 없는 직장인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얼마만의 휴식이라고 좋아했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려면 다이어트를 좀 해야할텐데 스트레스 때문에 먹는 양이 쉽게 줄지 않는것 같다. 잔소리를 할까 하다 그냥 두기로 했다. 이번 주말엔 좋아하는 피자를 만들어 주어야겠다.


글 - kyo
그림 - 정아 (인스타그램 - lint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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