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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Apr 07. 2016

#5 - 너에게 하는 인사

나는 여전히 네가 반갑다.

“안녕하세요”. 옹알이를 떼고 난 후 배우는 가장 긴 말이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부모님은 어김없이 억지로 앞섬에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주며 “안녕하세요 해야지” 하셨다. 무슨 의미로 하는지 정확히 몰라도 꼭 해야 한다는 것쯤이야 눈치로 알아간다.

높임말이 있는 우리나라는 특히 인삿말이 많다. 만났을 때는 “안녕”, “잘 지냈어?”,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말하며 오른손으로 악수를 청하고, 헤어질 때는 상대와의 친밀도에 따라 자동 필터된 인사말을 전한다. 예의범절을 익히고 도덕을 학습해서 인지 진심을 담아서든 상투적으로든 하루에 몇 번씩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하는 인사를 몇 살부터 아버지의 출퇴근길에 생략하게 되었을까.



학창시절, 특별히 웃기지도 않고 눈에 띄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없이 그저 밝게 손 흔들어 인사하면 호감이 가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간혹 얼굴만 까딱 흔드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에게도 꼭 손가락을 쫙 펴 흔들어 인사했다. 몇 개만 되는 고집 중 하나였는데, 진심으로 반가운 안녕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날 서운한 말이 오갔던 친구가 생기면, 내일부터는 인사를 건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적도 있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며 나도 모르게 ‘안녕!’을 외치고는, 그제야 어제 투닥거렸던 것이 생각나 서로 멋쩍은 웃음을 지은 경험이 있다. 순수하게 나는 그들이 반갑다.


그렇지만 딱히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대학생이 되며 내감정에 솔직해지고 인간관계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인사를 하는 선배를 정해두었다. 낯을 가린다는 쉬운 핑계로 안면이 있거나 엠티 때 옆에 앉아 챙겨주었던 선배들에게만 쑥스러운 듯 인사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부턴가 ‘아웃사이더’ 후배가 되어 있었다. 후에 선배가 되고 보니 아무리 생김새가 예쁜 신입생도 쌩- 하면 밥을 사주고 싶지도, 족보를 물려주고 싶지도 않더라. 예쁘고 싹싹한 후배들의 점심은 남자 선배들의 몫이 되고, 훈남에 애교넘치는 후배는 나도 모르게 빵 한 조각이라도 입에 물려주게 되는건 교내 자연의 섭리였다.


사회에 나와 회사원이 되면서는 더욱 인사를 의식적으로 잘 하게 되었다. 우리부서에도 어김없이 ‘돌+I’ 팀장은 존재했다. 입사 후 모든 사원에게 ‘어릴적 교육을 잘 못 받은 분이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었으니 ‘돌+I’ 호칭은 심하지 않은 걸로 하겠다. 작은 실수를 협박으로 꾸중하는 것은 그렇다 해도, 누구의 팀원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다. 타부서 사원들과는 다툼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해도, 팀원인 우리들과도 가뭄에 콩 나듯 기분이 좋을 때만 받아 주었다. 유치원생 시절을 회상하며 인사 연습을 한다는 마음으로 출퇴근 시 허공에 ‘안녕하세요’를 뱉었지만, 그 사람은 역시 받지도 보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이런 행동은 회사와 팀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고, 결국 그 분은 회사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물론 인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 사람의 부정적 성향을 드러내기엔 충분한 요소였다. 기본도 지키지 못하면서 부하직원들을 부리는 상사는 존경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적응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미천한 인사성은 회사의 돌+I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디지털도어락(Digital Door Lock)은 아버지의 희생을 정당하게 하는 고마운 핑계 거리 중 하나가 된다. 어렸을 때, 귀가하는 가족이 문을 두드리면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맞추고는 얼른 달려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특히 아버지에게는 더 힘차게 “다녀오셨어요!”하고 인사했다. 더운 여름엔 수박 한 덩이를, 추운 겨울엔 떡볶이를 사왔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다. 물론 엄마의 압박도 조금은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같이 모여 간식을 먹으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시간이 지나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현관으로 달려 나오는 발걸음이 느려지고, 인사를 생략해도 각자의 업에 집중하고 있다는 이유가 통하는 시기가 왔다. 번호 네 개만 누르면 스스로 들어올 수 있는 디지털 도어락 덕분에 굳이 내가 나가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 즈음 부모님과의 대화 시간이 짧아지고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도 많이 줄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회가 사라졌다. 하지만 중년이 되어가는 지금, 다시, 그리고 더 귀엽게 출퇴근 인사를 드린다. 30년을 넘게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에게 이 인사는 존재의 이유가 되길 바라며, 그리고 매일 조금씩 늙어가는 부모님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을 번다.



그리고 안녕은 작별의 시작을 전하기도 한다. 나는 그 흔한 이별을 한번도 겪어 본 적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사오며 친구들에게 연락하겠노라 손가락을 걸었던 이별이 내 기억 중 가장 슬픈 안녕이다. 울며불며 편지를 하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받아낸 후 손을 놓아주었던 기억난다.

애완견도 키워본 적이 없어 애지중지 키운 감정체가 사라진다는 건 영화, 책, 꿈속에서나 간접적으로 경험해본 게 전부였다. -햄스터가 서로를 잡아먹었던 것, 주인을 대신해 두 달 돌보아준 토끼와 강아지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은 포함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가벼운 안녕에도 적잖은 공허함을 느꼈다. 학창시절 하굣길에 버스를 타는 친구를 정거장에 바래다줄 때면 내가 먼저 등을 보이고 인사하는 게 우리끼리의 규칙이었다. 친구는 나를 먼저 보내고 버스를 탈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신호등에서 헤어지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파란불 신호에 내가 먼저 신호등을 건너가거나, 나를 보내고 친구는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혼자 기다리게 했다. 이렇게 이기적이었던 안녕은 역지사지의 가르침으로 성숙되었지만, 여전히 내 이별규칙 매뉴얼에 당신의 등을 마주하는 건 없다. 찰나의 안녕이든 영원의 안녕이든 나는 여전히 작별 인사에 미숙하다.



상대의 안녕을 기리는 인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업무처리능력이 부족한 신입사원도 인사성이 밝으면 어느정도 합격점을 받을 수 있으며, 상냥한 인사 한마디로 고객의 구매욕을 높일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45º가 살짝 모자란 각도의 허리굽힘+상대의 발끝을 보는 시선처리+입꼬리를 한껏 올린 미소+옥타브 높은 ‘안녕하세요’를 일 년이면 12번,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교육받는다. 서비스업이 아닌 나도 신입사원 교육에서 인사를 심도 깊게 배웠다. 외국어를 배울 때 또한 가장 먼저 배우는 ‘Hi(하이)’, ‘Hola(올라)’, ‘Bonjour(봉주르)’, ‘你好(니하오)‘는 단어가 짧고 쉬워서가 아니다. 당신의 첫 눈 맞춤을 허락 받을 수 있는 다중의 물음이다.

헤어질 때 손을 흔들며 으레 하는 “연락할게!”, “밥 한 번 먹자!”는 빈말 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과 더불은 희엿한 미소, 상기된 목소리는 진심이니까 얼마든지 괜찮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네가 반갑다.


글 - kyo
그림 - 정아 (인스타그램 - lint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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