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담는 방식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노래가 있다. 명국환의 〈백마야 울지 마라〉. 아버지가 직접 부르셔서 녹음해 두신 노래가 있다. 자료 정리에 선수인 내가 예전에 mp3 파일로 변환해 두었기에,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세상에는 이제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의 40대 육성은 여전히 내 노트북 속에 살아 있는 셈이다.
아버지만 그러셨을까. 어머니 노래도 한 곡 보관하고 있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수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를 부르신 것이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후렴 '난 정말 몰랐었네'인데, 문제는 늘 '네~'에서 반음이 살짝 내려간다는 점이다. 연습 삼아 여러 번 녹음하시며 다듬어 보셨지만, 그 반음은 끝내 바로잡히지 않았다. 그때 녹음을 지켜보던 누나들의 웃음과 핀잔이 떠오른다. 그래도 결국 음원 하나를 남기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공이다.
우리 가족은 대대로 음주가무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나 역시 노래 한 소절 제대로 뽑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남들은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푼다지만, 내겐 노래방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억지로 끌려간 자리에서 망신을 피하려면, 이른바 '18번 노래' 하나쯤은 준비해 둬야 했다. 그래서 군 생활 시절, 군인들의 단골 애창곡이던 〈천일의 맹세〉, 〈소양강 처녀〉 같은 트로트를 몇 곡 연습하곤 했다.
기억을 담는 방식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고 있다. 매터스(Matters)는 홍콩에서 시작된 블록체인 기반 글쓰기 플랫폼이다. 회원가입 후 글을 발행하면, 그 글은 곧바로 IPFS(분산 저장 기술)에 기록된다. 독자들은 'LikeCoin(라이크코인)'이라는 암호화폐로 '좋아요'를 누를 수 있고, 이는 곧 창작자의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잘 알려진 대로 이 플랫폼의 핵심은 '블록체인 기술과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있다.
내가 글을 발행하는 순간, 글은 IPFS로 전송되어 블록체인에 연결된다. 그때부터는 삭제나 편집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발행과 동시에 글의 내용이 암호학적 함수로 변환되어 고유한 16진수 해시값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띄어쓰기 하나만 수정해도 전혀 다른 값이 산출되므로, 디지털 원본의 저작권을 보호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결국 내가 쓴 글은 전 세계의 수많은 컴퓨터 노드에 분산 저장되므로, 이론적으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한 번 글을 올려보니, 발행된 글은 수정도 삭제도 되지 않았다. 단지 '비공개' 처리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을 뿐, 원천적인 삭제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순간 당황스러웠고,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더 이상 그곳에 글을 쓰지 않았다. 너무 영구적이어서, 오히려 무섭기까지 하다.
브런치스토리와 같은 글쓰기 플랫폼도 언젠가 진화하거나 변화하겠지만, 블록체인 속 글이 아무리 영원히 기록된다 해도, 손끝으로 눌렀던 카세트 버튼의 온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음 섞인 목소리처럼 마음속 노래와 기억은 어디에 담아둘 수 있을까? '백마야 울지를 마라', 비 내리는 오후, 카페에 앉아 구슬픈 아버지의 노래를 마음 저장소에서 꺼내 들어본다.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치른 타관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다시 고향생각 엉키는구나,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대문사진출처 :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