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속에서 나를 찾다

글: 미루

by 이십일프로

울적할 때면 간간히 다시 찾아보는 영화가 있다.


혹은 20년 전에 딱 한 번 봤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그 느낌이 생생한 영화들이 있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인가 MBC 주말의 명화에서 틀어 준 <블레이드 러너(1982)>가 필생의 영화 중 하나이다. 당시 그 영화를 보면서 단순한 재미를 뛰어넘어 마치 내가 그 영화와 깊고도 강렬하게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리적으로 보면 그때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무엇, 현재 또는 과거의 기대, 욕구, 내재된 감정 등등이 건드려졌던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때는 몰랐다. 그 당시엔 영화의 SF적 상상도, 주인공도, 음악도 “그냥” 좋았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그 영화에 특히 열광했던 부분을 알게 되었다. 남들은 SF의 전설로 부르는 이 영화를, 나는 일종의 로맨스 영화로 보았던 것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복제인간 킬러인데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이 여자는 자신이 인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복제 인간이었다. 허걱! 이 남자는 여자를 죽일 것인가? 남자는 이 여자만은 죽이지 않고 함께 멀리 사랑의 도피를 한다.


나는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 나를 많이 대입해 보았던 것 같다. 좀 쑥스러워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나의 정체성 일부를 그 영화 안에서 보았던 것 같다.



넓은 관점에서 예술은 모두 자기표현, 자기 성장의 이야기이고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찾아보면 돈 칠갑이 된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에서도 이를 조금은 발견할 수 있다. 어쨌건 ‘자아 찾기’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정말 좋은 영화들이 많은데, ‘나를 찾아가는 여자의 이야기’ 로 범위를 확 좁혀 보면 또 몇몇 영화들이 걸러진다.


자아 찾기는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든가, 역경을 극복하는 것과는 또 조금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면이 있는가’를 알아가는 것에 더 가깝다.


재미 삼아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판타스틱 소녀백서>에는 예쁘지는 않지만 다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춘기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가 겪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 러닝타임 내내 암울하게 그려지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보다는 좀 밝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나이가 되었지만 연애도, 취직도 다 삐걱대던 혼란스러운 90년대 풋풋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청춘 스케치>에 잘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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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면 또 가족을 빼놓을 수 없다. 가족에 비추어 본 나는 어떠한가?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뭔가 공허하고, 거기다 자매이지만 나와는 상극인 민폐 캐릭터 언니가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면? <스위티>에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열이 많은 한 젊은 여자의 자아 찾기가 섬세하게 그려진다.(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인데, 참고로 이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이 여성의 자아 찾기를 그리고 있다.)


애증의 존재, 엄마와는 어떤가?


거장이라 불리는 잉그마 르 베르히만의 작품 <가을 소나타>는 자기중심적이고 화려한 엄마와 비교하면 한없이 작았던 딸의 이야기를 유려한 미장센과 밀도 있는 이야기로 그려낸다. 그런가 하면 온갖 학대가 난무하는 정글 같은 가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딸들도 있다. 섬뜩한 공포영화 <캐리>(최근 리메이크작 말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1976년 작품)에는 광신도 엄마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파괴적이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던 딸이 등장한다. <프레셔스>에는 그야말로 막장 흑 인 가족의 비참한 현실에서 제정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제 길을 찾는 딸이 등장한다.


위의 두 영화가 좀 센 편이라 보기가 주저된다면, 따뜻한 가족영화 <욘커스가의 사람들>을 추천한다.


이 영화에는 결혼도 못 하고 집 안에서 시녀처럼 궂은일만 도맡던 착한 딸이 결국 자유를 찾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자의 인생” 하면 또 남자를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존중해주는 좋은 남자(남자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를 만나 자아를 찾는 여자들도 있다. 그 유명한 <피아노>,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이런 부류다. 하지만 <귀여운 여인(Pretty woman)>류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것은 살짝 위 험한 것 같다. 현실과 동떨어진, 화려하고 세련된 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그 환상을 이뤄줄 것 같은 남자를 만나 신나게 살다가 갑자기 무참히 박살난 여자가 <블루 재스민>에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영 어덜트>에서는 여차하면 재스민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 같은, 여전히 현실을 무시한 채 자신에 대한 환상 속에서 혼자 노는 노처녀가 등장한다.


소수 성향의 언니들을 위한 영화도 있다.


성적 정체성을 다룬 영화 <올란도>, <앨버트 놉스>는 주제 면에서도 귀하고 또 다행히도 잘 찍은 영화다. 아마도 이미 많이들 보셨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세크리터리>에서는 피학-가학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대담한 여성이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쉬울 정도로 독특하고 예쁜 영화이다.


뭐, 꼭 여성 영화로 한정하여 볼 필요는 없다.


나 같은 경우 <버디>,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 <굿 윌 헌팅> 등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나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하치 이야기> 같은 동물 영화에서도 가능하다! 고백하자면 이 영화들에서 내가 공감했던 것 중 하나는 소외감이었다. 주의할 점은 ‘아, 소외감 때문에 그랬구나, 소외감은 나쁘니까 극복해야지.’ 이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내 안에 내가 몰랐던 그런 것이 있구나를 충분히 알고 느끼는 것, 그것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떻게 해볼까’는 별개 문제인 것이다.



이제 여러분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라.


그동안 보았던 숱한 영화들 중 제일 많이 생각나는 영화가 있는지? 한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영화가 혹시 있는지? 좋아서 여러 번 본 영화가 있는지? 그 영화의 어떤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해서 지구촌 오지의 할머니들까지 제목을 알고 줄거리를 줄줄 읊는 영화라도, 당신이 특히 재미있게 본 부분을 말해보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것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남과 다른 나만의 무엇, 진짜 내 것은 무엇일까?
쉽지 않은 이 물음의 답을 영화를 핑계 삼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봄.... 바야흐로 영화를 보기도, 사색에 잠기기도 좋은 계절이다.



미루님은 혼자 땅굴을 열심히 파고 있는 언니입니다.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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