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적응』, 젬 벤델, 루퍼트 리드 외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 가파르게 5천 선을 돌파하는 코스피, 앞으로 성장할 나날들로 잔뜩 기대에 부푼 와중에 사회 붕괴라니.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리인가 싶을 수 있겠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언급되기 시작한 ‘붕괴학(collapsology)’이라는 이 학문은 “사회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며, 그러한 붕괴가 미래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붕괴의 조짐이라고 하면 마치 SF 영화에서나 들어볼 법하지만,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존하고 있다. 살얼음판 같은 국제정세, 전쟁, 환경오염, 기후위기 같은 것들 말이다.
파리협약을 거쳐 국제사회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선을 산업화 대비 온도 상승 폭을 기준으로 “가능한 한 1.5℃, 최소한 2℃ 이내”로 약속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 경계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이 경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1년 평균 기온은 2024년에 산업화 이전 대비 1.55℃ 높았고, 세계기상기구(WMO)는 최근 3년간 전 지구 연평균 기온이 산업화 대비 1.48℃ 높아진 것으로 분석했다. 1.5℃, 2℃ 상승을 돌아갈 수 없는 티핑포인트, ‘붕괴의 조짐’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그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책 『심층 적응(젬 벤델·루퍼트 리드 외)』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붕괴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우리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산업 문명 ‘구하기’를 선택한다면, 지구 시스템을 훨씬 더 빨리 가능한 티핑 임계값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생명에 종말을 고하게 만들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생물권을 보존하기로 선택한다면, 이는 몇 달 안에 우리 문명의 경쟁을 멈춰야 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의도적인 사회 및 경제 붕괴가 될 수 있다. (...)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우리 문명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 다시 말해 우리는 곤경에 직면한 것이다.
혹자는 기술적 해법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고, 또 혹자는 우주로 도피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어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을 이유로 이 곤경을 언급하기 꺼려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대로의 성장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그대로 흘러간다. 마치 지금의 경제가 앞으로도 그대로 팽창할 듯이.
우리는 다가오는 위기에 대해서는 굳이 깊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사고를 들키기 일보 직전인 아이가 애써 상황을 외면하려는 방어기제와도 같아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꼬집으며 오늘날 기후위기로 인한 붕괴를 부정하는 4가지 구성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체계적 폭력과 피해 공모에 대한 부정
(즉, 우리가 누리는 편안함, 안보,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수탈과 착취 덕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정)
- 지구의 한계에 대한 부정
(지구가 기하급수적 성장과 소비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
- 연관성에 대한 부정
(우리를 보다 너른 살아 있는 물질대사, 즉 생물-지능 안에 ‘연관되어 있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우리를 다른 존재 및 토지와 분리된 존재라고 인식하는 태도)
-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깊이와 규모에 대한 부정
(기후위기에 의한 피해 사실과 향후 예측되는 심각성에 대한 외면)
이러한 부정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것을 사실상 어렵게 만든다. 되려 그럴싸한 제품, 기술, ESG 경영을 들어 위기에 대응하고 있음을 합리화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일상 속에서 위의 4가지 요소를 자연스럽게 부정 혹은 외면하고 있다. 문제는 설령 위의 요소들을 인식하더라도, 개인의 수준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 제도·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가담하여 지구에 끼치는 피해’, ‘사회 붕괴의 가능성’과 같은 것은 애써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상 언론 등 주위에서 접하기 어렵다. 결국 개인이 느끼는 위기의 심각성은 여전히 현 추세를 유지하는 사회와 괴리되고, 이러한 인지부조화 상황에서 개인은 문제에 무뎌지거나, 문제를 망각하거나, 애써 합리화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 악순환이 개인을 무력화하고, 사회를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곤경과 그 시급성을 믿는다면, 현 상태가 지속가능한 문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안일함을 벗어나 붕괴의 가능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직면한 위기에 무뎌지지 않게끔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변화를 상상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마주한 곤경에 대해 다가올 피해를 줄이고 대비하기 위하여 ‘회복력, 포기, 복원, 타협’의 4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진 틀(4Rs)을 제시한다.
- 회복력(Resilience):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 포기(Relinquishment): 우리는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놓아줄 수 있을까?
- 복원(Restoration): 우리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우리에게 힘이 되도록 무엇을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
- 타협(Reconcilation): 우리의 공통 운명에 눈을 뜨면서 우리는 무엇과 그리고 누구와 함께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붕괴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어딘가 극단적이고, 회의적이고, 암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위기를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는 사회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지금 사회에 필요한 것은 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을 비롯한 주류 담론에서 제시하는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예견된 곤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이를 위하여 수많은 크고 작은 목소리와, 이들의 목소리를 아우를 공론장이 필요하다. 이미 티핑포인트를 넘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점진적인 대응’으로서 현 체제를 합리화하는 사회에서 붕괴를 전제로 하여 대안을 논하는 이 책은 다가올 위기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이들에게 때로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