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는 있지만 책임소재는 없는,
기울어진 느린 폭력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롭 닉슨

by 웨델해표


가난한 이들의 환경문제는 어떻게 정체되는가

1984년 인도 보팔에서는 미국 화학회사 유니온 카바이드의 공장에서 아이소사이안화 메틸 가스가 대량 누출되는 참사가 있었다. 사고 당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사고 직후 단 3일 만에 8천 명의 주민들이, 2009년까지 22,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사망했다. 유니온 카바이드는 누출된 가스에 대한 독성과 대응책에 있어서 분명한 정보 우위에 있었음에도 책임을 부인했으며, 사후에도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아 피해가 지속되었다. 결국 이 기업은 “추가적인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덧붙이며 피해자에게 턱없이 적은 규모의 금액을 배상했다. 이후 유니온 카바이드는 다우케미컬에 인수되며 사실상 증발했고, 다우케미컬은 이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가 저지른 재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근거로 써먹었다”. 참사 후 40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보팔에는 독성 쓰레기가 남아 있었으며, 지역 주민들이 3대에 걸쳐 기형아를 낳는 등 피해는 지속되고 있다. 피해자는 여전히 그 장소에 남아 있지만, 책임을 물을 곳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털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인 일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외부인들에게 참사는 하룻밤 사이 벌어진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남은 이들에게 보팔 참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느린 폭력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비슷한 사건은 반복된다. 2010년 석유기업 BP에 의해 대규모 기름 유출 사건(딥워터 호라이즌 재난)이 발생했을 때, BP 대변인 존 커리는 자연의 치유력을 들어 사후 처리를 자연에게로 외주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였다. 인도·중국 등에서 벌어진 매가 댐 개발은 건설 지대에 거주하던 공동체의 권리와 문화를 부정함으로써 거주자를 내몰았다. 환경문제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되었지만, 문제가 다루어지는 양상은 어딘가 소수자·빈자에게 불평등한 양상을 띤다. 책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의 저자 롭 닉슨은 가난한 이들의 환경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가난한 이들은 비가시성과 기억상실이라는 이중적 도전에 직면한다. 그들은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지만 가시성이나 공적 기억이라는 측면에서는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주변성은 부분적으로 데이비스가 말한 “평범한 재난의 변증법”─이에 따르면 위험 부담이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공정하게 가해지므로 재난이 과거사이자 잊힐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된다─에 의해 영속화한다. (...) 그것들을 예방하거나 그 폐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 조치에 대한 고려도 뒤따르지 않는다.




구조적이고 느린 폭력을 이어가는 초국가 기업의 거리 두기

오염물질을 다량 배출하는 공장은 마치 깊은 구덩이로 흐르는 물처럼 규제가 적고 협상력이 부족한 빈국에 자리 잡는 경향이 있다. 그곳에서 얻어진 자원 혹은 제품은 복잡한 공급망을 거쳐 전 세계로, 많은 경우 글로벌 노스로 이동한다. 그러나 오염물질은 그곳에 남고,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며 경제 논리에 의해 쉽게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이는 느리고 구조적인 폭력에 가깝다. 그 가치사슬의 최종 소비자에 우리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이 폭력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담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 중 많은 부분에는 빈국으로 가해지는 비가시화된 폭력이 베여 있다. 저자가 제시하듯, 기업은 “환경적 폭력을 낳는 원천을 더욱 추적하기 어렵게 만들고, 다국적 기업에 환경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는 일을 한층 까다롭게 만드는” 거리 두기 기제를 활용해 이러한 구조적 현상을 강화한다.


거리 두기 기제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포함된다.

첫째, 성장 주도적 소비를 전제로 한 원대한 전 지구적 꿈으로서 개발과 그에 따른 사회환경적 결과 간의 수사적 거리다.

둘째,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면서 나타나는 시장의 힘들 간의 지리적 거리다.

셋째, 오랜 기간에 걸쳐 피해가 점진적으로 퍼져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느린 폭력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사상자가 분산되면서 나타나는 단기적 조치와 장기적 결과 간의 시간적 거리다.


이러한 기제는 우리의 일상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재생에너지 설비에 대한 투자와 에너지 전환을 강조하지만 훨씬 큰 규모의 석유 시추를 이어오고 있는 거대 석유기업, 이 기업으로부터 생산된 석유가 포함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얽히고설킨 공급망과 정보의 비대칭,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더 자극적인 뉴스에 묻히는 현상 같은 것 말이다. 세계화에 힘입어 글로벌 노스-사우스 간 연결성은 더욱 강해졌지만, 이 연결성에는 어딘가 기울어진 방향성이 존재한다. 이 방향성에 따라 오염물질이 특정 지역으로 유입되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책임을 물을 곳이 보이지 않는다.




느린 폭력에 맞서 듣고, 쓰고, 말하는 이들

책의 맺음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우리는 지역적·국가적·세계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느린 폭력을 어떻게 가시적 현상으로 표현하고 그에 맞서 행동할 것인가?”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비가시화된 느린 폭력에 맞서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작가-활동가’가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다. 책 『침묵의 봄』을 통해 레이첼 카슨은 살충제의 위험성을 문학적 언어로 대중에게 알렸다. 나이지리아인 켄 사로위와는 소수민족 오고니족에 대한 석유회사 셸의 잔혹함을 증언으로 저술하였다. 이들의 저술활동은 문제를 포착하는 과정과 그 결과로서 글이 세상에 미친 파급력 그 자체로 환경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초국가 기업과 정부가 벌이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글로써 그들의 삶 이상으로 사건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회자되도록 했다.

온갖 자극적인 것들이 양산되는 시대에 규명하기도, 입증하기도 어려운 느린 폭력은 오늘날 쉽게 묵살될 수 있는 취약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나 동시에 매체가 갖는 빠른 확산성과 양방향성은 작가-활동가의 잠재력에 강한 힘을 제공한다. 이전에 소외되어왔던 많은 이들이 담론 형성에 참여하게 되었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시공간적 경계를 넘어 연결될 기회를 얻었다. 익숙하고 은폐되기 쉬운 사건에 대항해 담론을 이어가고, 연대하고,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의 크고 작은 활동은 오늘날 이루어지는 구조적이고 느린 폭력을 재인식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 Luca Frediani, 「Bhopal gas tragedy memorial」, Wikimedia Commons, CC BY-SA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