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먹히는 관계로부터,
먹고 먹이는 관계로 나아가기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유기쁨

by 웨델해표


화학공학을 전공하던 학부생 시절의 나는 ‘기술이 발전하면 기후위기도 해결되리라’는 식의 기술낙관주의적인 말들에 갈수록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그 무렵 졸업 직전에 접했던 생태철학 수업은, 내 안에서 내뱉어지지 못한 채 잔류하던 애매한 생각들을 정리된 언어로써 재확인하는 공간이 되었다.

교수님께서 사진과 함께 소개해주셨던 다채로운 농촌의 삶도 인상 깊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을 넘어 충격적이었던 표현은 단연코 교수님께서 제안해주셨던 ‘먹고 먹이는 세계’가 아니었나 싶다. 학창 시절부터 과학책에서 접했던 다윈의 적자생존, 약육강식, ‘먹고 먹히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를 먹이는 세계라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끼리도 먹고살기 위한 경쟁과 도태가 치열한 세상에 표현을 아주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그렇게나 따스한 관계로 재정의할 수 있음을 체감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 암탉 ‘잎싹’이 어미 족제비에게 새끼들을 먹이라며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내어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잎싹과 족제비의 관계와 달리, 우리는 다른 존재로부터 취한 것들을 마치 ‘승자의 전리품’처럼 당연한 듯 가져다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태계의 많은 것들을 취하며 살아 온 우리는, 누구를 그리고 무엇으로서 먹이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회

우리는 일상 속에서 흔히 인간과 동물을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짓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인간이 갖는 이성과 언어의 고유함과 같이 인간만이 갖는 특징을 찾아 다른 종보다 우월한 존재로 차별화하려는 시도는 고대의 서구 철학에서부터 계속되어 왔다. 이 과정에는 자연스레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를 하등하고 본능적인, 자의식이 없는 존재로 타자화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이러한 구분짓기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에게 간편함을 제공해주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존재를 마음껏 사용하도록 합리화해주었기 때문이다. 시장이 발달하며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는 대신 구매하는 사회로 전환하면서, 자연스레 우리는 다른 비인간 존재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농부와 같이 직접적으로 비인간 존재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대상이 아닌 이상 도시인이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비인간 존재는 의식을 지닌 생명의 형태가 아니라, 돈으로 지불하고 얻는 상품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사용하거나 소비할 때, 그 너머에 희생된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미 돈을 지불함으로써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가가 비인간 존재로 돌아가기는커녕, 착취의 구조를 강화할 가능성이 더 높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접근은 ‘도움을 주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착취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생태위기로 이어지며 인간에게까지도 위협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특별함’을 입증하고 구분지을 범주의 경계는 늘 도전을 받고 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새, 고래, 원숭이 등의 비인간 동물도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함을 입증하고 있다. 인간보다 더 지적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또한 오늘날 인간이 갖는 위치를 다시금 흔들고 있다. 어디까지가 인간이며, 무엇이 인간을 특별하게 하는가? 변화가 지속됨에 따라, 인위적으로 쳐놓은 경계선은 갈수록 더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책 <애니미즘과 현대 사회>의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며 인간이 다른 비인간 존재와 맺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인간을 우월한 존재로서 다른 종들과 구분짓는 방식은 애초에 서구 학자들로부터 유래되었을 뿐,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접근이 아니었다. 이와 대비되는 사고방식으로서 ‘애니미즘’은 과거에 종종 비인간 생물 혹은 무생물로부터 영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로서 다루어졌지만, 최근 인간과 다른 존재 간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낡은 애니미즘 너머의 애니미즘, 어쩌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관계적 존재론과 생활방식으로서의 새로운 애니미즘”을 소개한다.




수족관 속, 나를 바라보는 방어-사람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는 북미 원주민들의 애니미즘 문화를 새롭게 발견하여, “사람(person)”이 갖는 의미를 확장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흔히 사람=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곰-사람, 소나무-사람, 바위-사람과 같이 더 많은 범주를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대하려는 것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확장은 눈앞에서 다른 존재를 마주할 때,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내가 응시하듯, 저 횟집 수족관 속의 방어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횟집에 있는 것은 방어-사람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저 말장난 같기도 하고, 어딘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는 의도된 것이다. 다른 종을 사람의 범주에 포함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고기, 해산물, 목재가 아니라 그들만의 삶을 갖고 상호작용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 서구 사회로부터 확장된 인간 중심의 범주로부터 탈피함과 동시에,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 맺을 수 있는 여러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여전히 딜레마가 남아 있다. 우리는 종속영양생물로서 다른 존재들을 이용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다른 존재들을 고민 없이 이용할 수 있게끔 정당화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장벽을 허물수록, 어떤 것도 쉽게 먹을 수 없고, 입을 수 없고, 쓸 수 없게 되는 곤경에 처한다. 그렇다면 동물-사람도, 식물-사람도 사람이기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종종 동물권 운동, 동물실험 반대 등 다른 종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것, 나아가서는 가식적인 것으로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유가 이러한 것들에 기인한다. 어차피 인간은 다른 종을 해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을, 비인간 존재를 사람으로 대했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적절히 취하는” 방법을 하나의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키머러가 만난 전통적인 벌목꾼은 나무마다 개별성을 인정하고 비인간-사람처럼 대하며, 나무를 베기 전에 나무에게 허가를 구한다. 나무가 허가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포착되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동의를 받았으면 기도를 드리고 답례 선물로 담배를 놓아둔다.” 자기를 내어준 나무에게 감사하며, 전통적인 벌목꾼은 베어낸 나무를 소중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가을에 떨어진 나무 씨앗을 모아 두었다가 뿌린다. “다 마찬가지예요. 오는 것이 없으면 가는 것도 없어요. 이 나무는 우리를 보살펴줘요. 그러니 우리도 나무를 보살펴줘야 해요.”


핵심은 원주민의 문화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호혜성’을 갖추자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원 착취는 생태계가 회복 가능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으며, 결과적으로 각종 생태 위기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그 피해가 되돌아오고 있다. 인간이 자원을 이용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동물과 식물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관점이 이와 같은 무분별한 착취를 부추겼음은 자명하다.




서로를 먹이는 세상으로서 새롭게 관계 맺기

사실 인간이라는 범주는 그리 견고했던 개념이 아니며, ‘먹고 먹히는 세계’의 논리 역시 인간과 다른 종 간의 위계를 구분짓는 데에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 내에서조차도 우리는 다른 인종, 다른 국가, 다른 성별 등 끊임없는 범주화와 타자화에 종속되고, 그럴수록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세계는 좁아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인간 존재에 대한 관계 재정의와 ‘사람’의 범주 확대는, 역사적으로 흑인 차별을 배제하듯, 여성 차별을 배제하듯, 장애인 차별을 배제하듯 자연스럽게 이어질 여지가 있다.

온갖 인공적인 것들로 둘러싸인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비인간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잊어버린 채 상품으로서 그들을 접하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어디까지나 생태계에 의지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많은 착취가 생태 위기를 유발해온 만큼 생태계 속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하고, 이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선을 긋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호혜성을 베푸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다채롭게 연결될 수 있다. 다른 존재로부터 ‘무엇을 가져갈지’가 아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공존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호혜성에 기반해 서로를 ‘먹고 먹이는’ 관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펼쳐질 새로운 세계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