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린치 감독 | 나오미 왓츠, 로라 해링, 저스틴 서룩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 데이빗 린치 감독 | 나오미 왓츠, 로라 해링, 저스틴 서룩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어떤 꿈은 현실을 압도한다. 밴드도 없고, 오케스트라도 없지만 녹음된 음악으로 펼쳐지는 실렌시오의 공연처럼 모든 것은 환상이다. 이 길고도 지독한 꿈속 세상은 외면하고픈 현실과 맞물려, 눈길이 닿은 모든 인물들에 마법의 가루를 뿌려댄다. 다이안이 꾸는 꿈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것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며, 기존의 현실을 재조립해 희망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 있는 꿈이라는 바탕은 상황을 왜곡시켜 잠에 빠진 상태로의 지속을 꾀한다.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이 기괴한 판타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으로 가득하다.
베티는 미스터리 한 여인, 리타와 얽혀 있음에도 그녀와 함께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게 행동하고 때때로 진취적이다. 게다가 뛰어난 연기실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도 잡는다. 호의와 친절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녀는 밝고 명랑하다.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사는 그녀는 구김이 없다.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바라던 오디션에 합격하고, 리타와의 하룻밤을 보내며 사랑을 얻는 것에도 성공한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감독, 리타 등)이 고초를 겪는 동안에도 그녀만은 무사하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성공하고, 할리우드에 입성한다.
무의식은 소망의 발현이다. 그곳에선 현실에서의 좌절도, 초라함도 없다. 그저 바람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긴박함과 불투명함으로 가득하지만, 그녀의 삶과 무관하다. 오직, 그녀의 인생만이 장밋빛이다.
의식 아래 잠들어 있는 삶의 궤적은 리타라는 여인과 얽혀 자연스레 흘러간다. 그녀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리타를 도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벌어진 사고에 대해 조사하고, 과거의 행적을 쫓아 실렌시오에 당도한다. 환상으로 점철된 그곳에서 그들은 눈물을 흘린다. 환영일 수밖에 없는 존재를 실감키라도 한 듯, 슬픔에 휩싸여 있다.
실렌시오는 특별하다. 모든 인물들이 실제를 연기(演技)한다. 그리고 연기(煙氣) 속으로 사라진다. 깨어날 수밖에 없는 꿈의 특성상 베티와 리타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도 일종의 연기(演技) 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존재도 극의 한 부부일 뿐이다. 배우라는 꿈을 가진 그녀가 꿈속에서 펼치는 연기(演技)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또렷하여 실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을 잊어버릴 만큼 생생하다. 현재를 지울 만큼 선명하다. 높은 해상도를 가진 꿈은 간절함의 무게와도 같다. 그녀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절박한 이상이지만, 실제 그녀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기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2
오디션을 보기 위해 LA에 당도한 베티는 숙모가 사는 숙소에 몰래 숨어 들어온 리타를 만나게 된다. 사고를 당해 기억을 상실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베티는 혼란에 빠진 리타를 도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난 사고에 대해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다이안 쉘윈이라는 인물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에라 보니타 17호에 살고 있는 다이안 쉘윈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지만, 악취로 가득한 그곳에서 시체 한 구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날 밤, 문득 떠올린 실렌시오라는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그들은 우연히 떨어진 상자 하나를 발견해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상자를 열기 위해 자신의 가방에서 열쇠를 찾던 리타는 사라진 베티를 뒤로한 채, 기어이 파란 상자를 열어낸다.
한편, 제작자로부터 캐스팅 압박을 받던 감독은 아내의 불륜과 파산 소식을 동시에 듣는 불운을 겪게 된다. 집을 나온 뒤 파크 호텔에 숨어 지내던 그는 회사 직원이 알려준 카우보이라는 인물을 만나 카밀라 로즈를 캐스팅하라는 협박을 또 한 번 받는다. 이튿날, 세트장으로 향한 그는 오디션에서 “이 여자로 하죠.”라고 말하며 압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자를 연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다. 현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잠 속에서 유망한 배우 지망생이던 베티는 다이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명배우이며, 그녀가 사랑하는 리타는 카밀라 로즈라는 유명배우로서 감독과 깊은 관계를 가진 자이다. 숙모의 집에서 매니저를 보던 코코는 감독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감독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된 그녀는 변변치 않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털어놓고, 카밀라와 감독이 공인된 관계임을 선언하는 소식을 듣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이것이 그녀가 직면한 냉혹한 현실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난 다이안은 협탁에서 파란 열쇠를 발견하게 되고,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한다. 자신이 청탁한 살인청부업자가 일이 끝나면 열쇠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자신을 비웃는 노부부의 환영을 보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3
모험은 깨어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상자를 여는 순간에 베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자를 여는 것은 리타의 역할이다. 차마 제 손으로는 열쇠를 돌릴 수 없다. 그녀는 이 세계를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되돌아온다. 그녀는 숙모의 거대한 저택이 아닌 낡고 어두운 17호 집에서 깨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안이다. 두 사람이 그토록 찾아 헤매이던 인물이자 꿈속에서의 행위 역시 자신을 찾아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임을 알려주는 징표이다. 잠에서 깬 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결핍으로 가득 찬, 참담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영화는 “실렌시오”라고 외치는 어느 여자의 목소리로 끝이 난다. 이것마저도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현실의 고통을 피해 도피하듯, 행해지는 무의식이라는 환영은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려는 방어체계로 작동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인간은 유약한 스스로를 지켜내며, 불리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낸다.
마음의 층위는 억압된 욕망의 크기만큼 분열된다. 이성을 몰락시키고, 현재의 가치를 외면하게 만든다. 경험을 재료 삼아 쌓아 올린 심리적 소원은 유약하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창조해 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분리는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는 정신 승리일 뿐,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기에 다이안은 자신이 갖지 못하는 사랑을 살인 청부 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없애버리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이상적 결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으로 가득하다. 현실은 극히 일부이며, 모든 것이 가상이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마저도 거짓이다. 결국 영화를 관람한다는 행위 자체도 영사된 스크린을 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시간과 돈을 들여 환상을 목도한다. 현실에서 빠져나와 꿈속에, 스크린 속에 자신을 투사한다.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듯, 영화는 시종알관 실렌시오를 외친다. 실렌시오는 극 속의 극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연극인 세상에서 이것 또한 하나의 환상일 뿐임을 알려주는 각성제 역할을 한다.
감독은 영사를 통해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거기에 매몰되거나 종속되지 않도록 극의 이곳저곳에 각성의 장치를 마련해 흩뿌려놓는다. 점프스케어가 그 예인데, 관객을 놀라게 함으로써 몰입을 깨부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결국 그는 지루하고, 지리하더라도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